너와 보낸 겨울과 여름과 봄, 가을을 기억해.
그즈음의 학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높은 담장 위로 무섭도록 자라난 담쟁이넝쿨이다. 학교는 큰 도로변에서 위로 뻗쳐나간 좁은 경사로 위에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면 왼편에는 못생긴 체육관이 하나 있었는데. 좁은 운동장에서 초록색 체육복을 뒤집어 쓰고 담장을 따라 걷던 일이, 피구 경기를 하던 일이 조금 생각난다. 흙먼지 내려 앉은 스탠드와, 그곳에 지루하게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체육대회의 날도 어렴풋하다. 정작 교실 안에서의 기억은 얼마 없는데, 아마 모든 교실에서의 기억이 다 엇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를 나서 도로변에 진입하면 왼편으로는 로터리가, 그 로터리 너머로 도시 안의 유일한 대학가가 나왔다. 그 너머에 사는 친구들은 일반적으로 조금 더 부유했던 것 같다. 나는 정반대 방향인 학교의 오른편, 조그마한 주택가가 늘어선 작은 동네에 살았다. 정확히는 큰길가를 따라 30분쯤 걸으면 나오는 삼거리의 가장자리였는데, 그 너머로는 한동안 주거지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이 도로만 쭉 뻗어 있을 따름이니, 동네의 정확히 끝자락에 살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 봄, 학교를 마치면 천변을 따라 함께 천천히 걷곤 했다.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아니었다. 우리 집이야 그냥, 도로변을 따라 쭉 걷기만 하면 나오는 곳이었으니. 다만 내가 기꺼이 돌아가는 길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천변을 따라 잎이 무성한 벚나무가 늘어서 있기 때문이었다. 봄철이면 특히 하얗게 만개한 벚꽃이 스치는 바람마다 흩날려서, 손을 뻗으면 벚꽃잎이 하나 둘 잡히곤 했다. 적어도 내가 처음에 그 길로 가는 이유로 댄 것은 그 천변이 그 계절에 특히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봄기운이 모두 가신 후에도 나는 늘 그 길을 따라 걷곤 했는데, 당연히도, 너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아마도 여름이었거나, 여름으로 가는 초입이었을 것이다. 늘어선 가로수 위로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다 진 어느 날, 무거천(無去川)을 따라 나란히 걷던 중에, 네가 불쑥 물었다.
"좋아하는 신체기관이 뭐야?"
"신체기관? 어떤 거?"
"그냥 뭐, 허리나 머리카락이나 다리나, 그런 거."
내가 그때 무어라 답했던가,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너는 손을 좋아했다고 했던 건 기억이 나. 뼈가 도드라진 모양도, 기다란 손가락도, 둥그런 곡선도 다 좋다고 했지. 이어서 네가 농담을 던져서, 그 모든 신체기관 이야기는 이 얘기를 하려고 꺼낸 거였구나, 싶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어제 엄마한테 물었더니 엄마는 내장이 제일 좋다고 하더라. 꼬불꼬불 꼬부라진 게 아름답지 않니? 하면서."
나는 그게 뭐야, 하고 웃었다.
너는 좀 특이한 애였다. 또래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무던한 성격 역시도 그랬지만, 정확히는 남들보다 한참 이른시기에 자신의 재능을 찾아서, 그것을 뚜렷하게 돋보이는 수준으로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그랬다. 고작 열다섯 살이었던 네가 얼마나 능숙하고 섬세한 선을 그려내는지 보고 있으면 질투가 나다가도, 그 질투마저 곧 사그라들곤 했다. 풍부한 레퍼런스와 정확한 안목, 미적 감각,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금세 어설프지 않게 되던 그 능숙함까지. 너는 어떻게든 미술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 같았다.
어차피 미술에 큰 소질도 욕심도 없던 나의 질투는 곧 동경으로 화했고, 그 나이답게 가장 특별해지고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은 너를 앞지르는 것이 아니라, 네 옆에 있는 것을 목표로 삼는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네 가장 가까운 자리에 내가 있길 바랐고, 내가 너에게 특별한 존재, 그 누구보다 의지할 만한 친구가 되길 바랐다. 그런식으로 너의 특별함을 나의 것으로 공평히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내게 네가 중요한 만큼, 네게 내가 특별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종종 너의 무신경한 친절에서, 공평한 애정에서 느끼곤 했기 때문에. 그게 네가 냉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나의 바람이 이기적이고 유치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마저도 나는 알았다.
어영부영 지나간 그 계절 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가 언니의 가출과 잇따른 자해로 마음이 붕 떠있을 즈음 나는 너와 사이가 소원해진 채 그 학교를 떠났고, 우리는 아직 서로이웃으로 남은 블로그를 통해서나 종종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네가 그곳에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고 쓰기 시작한 것은 그러고도 두서너 해가 지난 후부터였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게 나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그저 어디에 말해두기라도 하고 싶어서 적어두는 말일 따름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심 기뻤다. 내가 너를 위로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너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우울한 너를 위로하고 싶었던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보다 그때의 내겐 너의 내밀한 이야기를 '내가' 들었다는 희열이 앞섰을 것이다. 고민 끝에 가끔 몇 마디 건넨 말도 네게 가 닿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러다가 네가 더이상 블로그에 기록조차 남기지 않게 되면서, 너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졌다.
그 즈음 내겐 빈 공간마다 빼곡하게 낙서를 하는 버릇이 붙었다. 풀고 난 시험지나 내가 앉은 책상마다 온갖 그림이 가득 찼다. 처음엔 여러가지를 그렸지만 나중에는 손만을 그리게 되었다. 다양한 손동작들, 도드라진 뼈와 핏줄, 손톱, 주름, 그림자, 그런 것들을. 그 때 그린 그림만 몇 백 장은 될 것이다. 남은 것은 얼마 없다. 전부 어딘가의 소각장에서 불타버렸거나 다 녹아서 반듯한 새 종이가 되었겠지. 이제는 시간에 쫓겨 딱히 낙서를 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내가 하필 그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된 이유는 기억한다.
너를 이해해보고 싶었고, 네가 보는 세상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러다 네 생각이 다시 난 것은 지나간 가을의 일이었다. 불 꺼진 자취방 침대에 앉아서, 무드등 불빛에 드리워진 손 그림자를 멍하게 바라보던 중이었다. 방학에 다른 친구를 만났더니, 그 애가 너는 홍대에 갔다고, 잘 지내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정작 그 말을 들을 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때는 새삼스럽게 안도하게 되더라고. 정말로 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던 날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네가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했어. 비록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지만.
만약에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나는 너를 제대로 위로해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은 헛된 가정보다는 이런 것들이겠지: 그때 우리는 둘 다 미숙했고, 서로에게 그만큼 가까이 다가갈 만한 사이는 되지 못했다는 것. 내가 힘들어 하던 때에 네가 날 위로하지 못했듯, 또 내가 죽고 싶어하던 널 위로하지 못했듯,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몰랐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는 것. 그런 아주 건조하고, 매정한 사실들.
가끔, 나는 너를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기도 했지. 하지만 이제는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다른 무언가로부터 위로를 받아서 네 삶이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한 것이 되어있는 거라면, 그래서 네가 지금 죽지 않고서 이 버거운 생을 버텨나가고 있는 거라면 그것만으로도 그냥, 좋을 것 같다.
너는 내게 좋아하는 것을 하나 만들어 주었지. 고마워. 너무 늦은 인사지만.
이제는 훌쩍 커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있을 네가 행복하길 바라.
그런 마음으로 이 에세이를 썼다. 6년 전 지나간 가을에, 그 좁은 자취방 안에서.
그리고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작년 가을, 자다가 깨어 새벽에 한참 이 글을 고쳐 쓰곤 했다.
오래 묵힌 마음을 꺼내,
나의 지나간 모든 인연들에게 바친다.
고마웠어. 미안해. 네 앞길에 좋은 일만이 있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