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투발루
투발루에서는 바다를 질리도록 볼 수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의 특성상 해안선이 길다. 그래서 동쪽으로 가던지, 서쪽으로 가던지, 잠시만 걸어도 바다를 볼 수 있다. 대양인 동쪽 바다는 섬에 부딪히는 파도가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면 무섭다. 특히나 비 오는 날 동쪽 바다를 보면 모아나의 아빠가 왜 암초를 넘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런데 서쪽 섬 안쪽은 잔잔한 파도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고요한 바다가 섬을 지켜주는 것 같다.
투발루의 아이들도 학교를 마치면 교복을 갈아입고 석호 쪽으로 모인다. 석호 쪽에는 UNDP 주도로 투발루의 땅을 넓히는 해안선 정비 사업지가 있다. 정비 사업지 남쪽에는 썰물 때는 물이 빠져 육지로 변하지만, 밀물 때는 모래를 쌓아 둔 둑 때문에 수영장으로 변하는 곳이 있다. 둑이 있어 아이들이 바다로 휩쓸려 갈 염려도 없고, 물도 깊지 않아 아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투발루 아이들이 바다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너무 유쾌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즐겁나 보다. 작은 소리에도 꺄르륵 웃는 유아처럼 아이들은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둑에 올라가 다이빙도 하고, 서로 수영 시합도 하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물놀이에 집중한다. 학원도 없고, 인터넷 강의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는 투발루에서 자연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다.
아이들 뒤로 남태평양의 윤슬이 눈이 부시다. 파랗다는 말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에메랄드빛 바닷물에 태양 빛이 비친다. 서서히 서쪽으로 지는 해가 파도도 없는 석호 쪽 바닷물에 반사된다. 난 윤슬이 빛나는 태양평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활홀경에 빠졌다. 그자리에 서서 가만히 이 장면을 나의 기억속에 새겼다.
마찬가지로 UNDP 해안선 정비 사업지 북쪽에도 아이들의 수영장이 있다. 여기는 며칠 전 외국인 친구들과 스노클링 여행을 시작했던 Morning Star Church 뒤에 있는 작은 선착장이다. 선착장이다 보니 작게나마 제방이 있어 아이들이 수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여기서도 아이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물속에 서로의 몸을 끌어당겨 상대방을 끌어당겨 넘어뜨리는 시합을 한다. 보트 위에 올라가 다이빙도 한다. 아주 평화로운 남태평양의 오후다. 아주 즐거운 남태평양의 자유로운 순간이다.
석호는 투발루의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수영장이다. 어떠한 인공적인 수영장이 남태평양의 천연 바다 수영장보다 클 수 있겠는가? 자연이 투발루 아이들에게 준 거대한 선물인 듯했다.
이 풍광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이 바다가 투발루 아이들이 나고 자란 고향을 삼킬 것이다. 아이들의 수영장이 더욱 넓어지는 만큼, 아이들의 고향은 더욱 좁아지는 것이다.
만약 해안선 정비 사업지가 없었더라면, 킹 타이드 시기에 이 바다는 아이들의 집과 등교를 위해 다니는 길을 잠기게 할 것이다. 바다는 아이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다. 그러나 해안선 정비 사업지는 지금 이 순간에는 아이들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다. 아이러니 할 뿐이다.
일주일에 투발루 푸나푸티 국제공항에는 비행기가 일주일에 4회 착륙과 4회 이륙을 한다. 착륙한 비행기가 착륙하고, 뒤따라 승객이 내리고 짐이 내려진다. 이후 같은 비행기에 승객이 타고 짐을 싣고, 비행기는 이륙한다. 비행기의 착륙부터 이륙까지 1시간이 안 걸린다. 4회라고 해 봤자 최대 4시간이다. 일주일이 168시간인데, 비행기 활주로가 활주로로써 쓰이는 시간은 4시간뿐이다. 나머지 164시간 동안 활주로는 여행객을 위한 곳이 아닌 투발루 주민을 위한 곳이 된다.
활주로는 만인의 운동장이다. 오후 4시쯤이 되면 활주로는 사람들로 꽉 찬다.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활주로의 곳곳에서 축구, 배구, 럭비 시합이 열린다. 1.8km 정도 되는 활주로 곳곳이 이들이 운동장이다. 한쪽에서는 축구 선수들이 체력 훈련을 하는 데, 그 옆에서는 아이들이 배구나 축구를 한다. 그리고 그런데 축구나 배구를 대충 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선가에서 축구 골대를 들고 와서 활주로에 축구 골대를 설치하고, 배구 네트도 정식으로 설치한다. 아주 정신이 없지만, 그래도 정석으로 진지하게 운동한다.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체육활동을 하지만 국제 대회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주로 참여하는 대회는 4년마다 열리는 태평양 지역의 퍼시픽 게임(Pacific Games)이다. 그리고 하계올림픽도 참여하고 있다. 투발루는 국제올림픽 위원회에 2007년 가입해서, 2008년 중국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에 최초로 참여했다. 최초의 선수단은 100m 육상 경주에 남자 선수 1명, 여자 선수 1명, 역도 1명으로 총 3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뒤로 2012년 런던 올림픽(육상 2명, 역도 1명),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육상 2명), 2020년 도쿄 올림픽(육상 1명, 역도 1명)에도 계속 선수를 보내고 있다. 아쉽지만 아직까지 하계올림픽에서 메달은 따지 못하고 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숙소에 머물다가 오후 3시쯤이면 다시 숙소를 나선다.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고민한다. 섬이 넓은 것은 아니지만 구석구석 다니기를 목표로 한 여행자로서는 아직 갈 곳이 많다. 오늘은 발길이 닿는 대로 남쪽으로 갔다. 숙소에서 5분쯤 걸었을까?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린다. 여행자로서는 이런 것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LJ 엔터프라이즈 스토어(LJ Enterprise Store) 앞에 포켓볼 당구대 2개가 있고, 그 주변에서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포켓볼을 치고 있다. 여행자에서 구경꾼이 되어 나도 모르게 포켓볼에 빠져든다.
투발루의 포켓볼 규칙도 한국의 8볼(Eight Ball) 규칙과 같다. 공격을 위한 흰색 공 한 개와 넣어야 하는 공 15개를 사용한다. 1번에서 7번 공은 색깔 공이고, 9번에서 15번 공은 줄무늬 공이다. 2대 2로 편을 먹고 번갈아 가며 흰색 공을 쳐서 당구공을 넣는다. 당구공에 써진 숫자와 상관없이 색깔 공 팀은 색깔 공 7개를 먼저 다 넣고, 줄무늬 공 팀은 줄무늬 공 7개를 다 넣으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공을 다 넣으면, 마지막으로 검은색 8번 공을 넣으면 이기는 경기다. 다만, 8번 공을 마지막으로 치기 전에 내가 8번 공을 어디에 넣을 것인가 지정하고 거기에만 넣어야 한다. 그리고 전 판 승리팀이 이기면 새로운 도전팀이 다시 도전하고, 전 판 승리팀이 지면 새로운 도전팀이 새로운 승리팀이 된다. 아직 익숙한 규칙이다.
10분 정도 투발루 포켓볼을 눈으로 보면서 익히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포켓볼 쳐볼래요?”
“오! 좋죠”
“이 어르신이 편이 없으니 이 어르신과 같은편 하면 돼요.”
그러고 보니 내가 왔을 때부터 포켓은 안치고 혼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앞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나와 할아버지가 도전팀으로 전 판 우승팀에 도전했다.
삼각형의 랙에 모아뒀던 포켓볼 공 무더기를 깨트릴 차례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하라고 했지만, 브레이크 샷을 할아버지에게 양보했다. 따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일순간에 모여있던 포켓볼 공들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나도 최선을 다해 나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쳐봤는지도 모를 포켓볼지만, 다행이도 몸도 머리도 포켓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실력이 부족한 나머지 우리 편의 공 보다는 상대 팀의 공이 하나둘씩 더 빨리 당구대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왼손으로는 담배를 피우고, 포켓볼은 오른손 한 손으로만 치고 계셨다. ‘뭐지? 손이 불편하신가? 담배 피우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차마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는 못하고 혼자 궁금해하던 찰나였다. 우리가 지고 있던 순간이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두 손으로 포켓볼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의 색 공이 하나, 두 개, 세 개, 네 개 연속해서 들어간다.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한 손! (One hand!)”
할아버지는 그 말을 무시하고 순식간에 8번 검은색 공까지 넣어 우리가 승리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사큐사(Sakiusa)로, 그는 포켓볼의 신이었다. 포켓볼을 너무 잘 치는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게임에 껴주지 않던 것이었다. 그리고 포켓볼을 너무 잘 치키기에 나름 패널티를 줘서 한 손으로만 포켓볼을 쳤던 거였다.
한국에서 사구 50밖에 치지 못하는 외국인과 포켓볼의 신이 만나 팀을 이룬 덕분에, 우리 팀의 실력이 어느 정도 평균으로 수렴한 것 같았다. 샤큐사 덕분에 우리 팀은 내리 3판을 이기고, 네 번째 판에는 젊은 친구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투발루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파악하고 투발루에 왔는데 포켓볼에 대한 정보는 나에게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포켓볼도 연습하고 왔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우연한 기회에 투발루 주민들과 같이 포켓볼로 하나 된 것이 재미있었다. 특히나 별로 말이 필요 없어도 즐길 수 있던 놀이라 그랬던 것 싶다.
20240309 162855 윤슬★
GX017812 활주로 축구★
GX017746 활주로★
GX017749 당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