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세상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by 자유로운 풀풀

"파랑새반 한 줄 기차 모여라~!"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데 연이가 보이질 않는다. 6~7명의 아이들이 줄을 서자 연이의 옷자락이 보인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친구의 손을 붙들고 한 손은 선생님을 가리키는 연이. 선생님이 부르니 모이자고 친구에게 말하는 듯하다. 뒤쪽 즈음 줄을 서서 선생님을 따르는 연이다. 불과 한 달 전의 나였다면 '선생님이 부르는데 앞쪽에 줄을 서야 할 텐데, 친구 그만 좀 챙기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 나는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친구도 챙겨 가는 고운 마음이네.'라고 미소 지었다. 두 달여간의 기관 생활이 지나니 마음의 여유가 한 뼘 더 늘어났기 때문이리라.

아이는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선생님을 중심에 두기도 하고, 친구를 중심에 두기도 하며, 스스로를 중심에 두기도 한다. 중심에 선생님을 둔 아이는 칭찬을 받기 쉬울 테고, 친구를 둔 아이는 단짝을 만들게 될 테고, 스스로를 둔 아이는 자신만의 놀이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이가 선택한 것이며, 그 순간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일 테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두고 이런저런 걱정과 기대를 하는 이는 부모이다. 교사의 한마디에 온 신경이 곤두서기도 하고, 친구와의 트러블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자신의 놀잇감을 창조한 아이의 사회성을 걱정하기도 한다. 반대로 교사의 칭찬에 부모가 금메달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우정에 마음이 따스해지기도 하며, 아이의 창작물에 비치는 영특함에 눈이 번쩍 뜨이기도 한다. 관찰자인 부모가 세워둔 기준에 따라 같은 상황이 다르게 평가되는 것이다.

아이의 세상을 아이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아이와의 소통이 쉬워진다. 아이가 어느 부분에서 성취감을 느끼는지, 어느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한지가 아이의 시선에서 보인다. 무언가를 시도하고 도와주려는 부모의 입장도 편해지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이도 충족감이 높다.

연이가 기관 야외활동 시간에 친구를 먼저 챙겼다. 연이는 처음 생긴 단짝 친구와의 소중한 시간들에서 행복과 자신감을 획득하는 중이다. 만약, 교사나 부모가 그런 아이의 행동을 '제시간에 재빠르게 움직이는 민첩성의 부족, 교사 지시에 대한 비순응성'이라고 인지한다면 연이가 맛본 성취감의 시간들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아니 성취감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친구와 노느라 교사의 말을 종종 놓치는 산만한 아이로 낙인찍히고 말았을 테다. 좀 과장된 거 아니냐고? 보호자의 컨디션이 평균적인 수준을 유지할 때는 과장되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럼, 보호자가 컨디션 난조로 휴식이 필요한 순간일 때를 가정해보자. 나는 너무나도 피곤해서 당장 침대에 드러누워 자고 싶다. 아이는 황사 먼지를 뒤범벅한 채 거실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아이가 씻어야 할 시간이다. 지금 당장, 아니 10분 안에 욕실로 들어가지 않으면 씻기고 밥 먹이고 할 여유가 부족할 것 같다.
"할 일을 얼른 해치우자."
머릿속에 경고등이 깜빡인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몰입 중인 아이에게 이제 씻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곧 씻으러 들어갈 거라 말한다. 5분 뒤에 들어갈 거라고 말한다. 아이가 싫다고 징징거린다. 좀 있다가 씻을 거라며 짜증을 낸다. 내 머릿속에 경고등이 두 번 더 깜빡인다. '얘가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지? 지금 씻지 않으면 감기 걸릴 거 같은데? 얜 늘 이런 식이지. 하자 그럼 제때 하는 법이 없어. 나가서도 그러는 거 아냐?' 머릿속에 이런저런 걱정들이 뭉게뭉게 솟아오르다, 아이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아간다. 그다음 상황은 상상에 맡긴다.

아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푹 빠져있다. 캐릭터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자신도 함께 영웅이 되어 모험 중이다. 하늘을 솟아오르기도 하고, 전략을 구상하기도 하며, 영상 속 친구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며 노는 중이다. 아이는 제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즐겁게 만들어가는 중인 것이다. (중독과 다르다. 의도적으로 조성된 환경 안에서의 노출이다.) 보호자가 아이의 시선으로 내려가 바라보았다면, 그럴만한 틈이 있었다면, 프로그램 속 주인공이 되어 함께 여행을 하는 아이가 보였을 것이다. 곁에 앉아 이러쿵저러쿵 말을 섞어보다 욕실로 들어갈 방법을 눈치껏 찾아냈을 것이다. '어, 연이 머리카락에 먼지벌레! 후우 후우!' 따위의 아이 수준에 맞는 그럴싸한 육아서식 문장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세상으로 내려가,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 틈이 있었다면 말이다.

아이의 세상은 아이의 것이다.
교육서적을 더 많이 읽은 교사도, 육아에 한껏 열정을 보이는 부모도 아이의 세상을 대신 살고 있지 않다. 아이의 세상은 아이의 것이요, 개인의 삶은 각자의 것이다. 아이를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고? 그건 아이를 내버리는 것이다.

전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아이의 세상을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봐주세요. 아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기쁨을 나누고 싶을 때, 슬픔을 위로받고 싶을 때가 조금 더 보일 거예요.

아이의 세상을 그의 것으로 바라보기. 점점 더 자라나는 아이를 위해 부모가 줄 수 있는 선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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