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막한 손톱 끝으로 티셔츠에 눌어붙은 토마토 국물을 긁어냈다. 슥슥 문질러 털어내니 희끄무레한 자국만 남았다. 한 군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커다란 검은 박스티 여기저기 얼룩덜룩한 음식 찌꺼기가 묻어있다. 빨리 나가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티셔츠를 갈아입지 못한 탓이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다른 엄마들 만나면 민망하겠는데-."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두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단지 내 놀이터를 가는 길이 순식간에 런웨이가 되어버렸다. 길거리의 그 누구도 나를 보지 않지만, 무수히 많은 내 안의 눈이 나를 스캔했다. '타인의 눈'이 아닌 '나의 눈'이.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는데 최적화된 나의 패션이 순간 머쓱해졌다.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는데 최적화된 나의 패션은 이러하다.
똑딱핀으로 야무지게 걷어올린 앞머리, 한 올이라도 흘러내릴까 단단히 묶은 꽁지머리, 로션만 바른 순수한 맨 얼굴. 어떤 방향으로 허리를 숙여도 속살이 절대 드러나지 않는 박스핏 티셔츠, 어디서든 주저앉을 준비가 된 검은색 항아리 바지, 분홍색 물병 두 통이 포켓 양 옆으로 자리 잡은 커다란 백팩. 놀이동산을 갈 때도, 마트를 갈 때도, 영화관을 갈 때도, 커피숍을 갈 때도 동일하다. 색만 미세하게 바뀔 뿐, 디자인은 모두 같다. 깔 별로 맞춰둔 육아 교복인 셈이다.
다섯 살 두 딸과 손을 맞잡고 걷는 나들이길에는 '편안함'이 최고다. 변화무쌍한 날씨, 그보다 더 날뛰는 두 딸아이와 이리저리 이동할 때는 '엄마인 나'의 어떠함이 신경에 거슬리면 안 된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아이들 용변을 도와주다 보면, 무릎 즈음의 원피스 자락은 어느새 화장실 바닥을 청소하고 있다. 예뻐 보이고 싶어 꺼내 입은 스키니진은 온몸에 달라붙는 아이들의 무게를 두배로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아이들 돌봄에 최적화된 옷차림, 그것이 가족 나들이를 더욱 즐겁게 만드는 최고의 무기다.
난 박스티셔츠에 항아리 바지(라고 쓰고 몸빼라고 읽는..)로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심지어 압구정의 강연장에 갈 때도, 강연 후의 육아를 위해 당당하게 항아리 바지를 입었다. 육아가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아니, 육아의 힘듦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면 패션 따위야 내 맘대로 창조해 낼 배짱이 있었다.
그런데, 눌어붙은 토마토 국물 따위가 뭐라고. 아이 둘과 나만 있는 단지 내 산책로가 번쩍이는 런웨이로 바뀌고, 나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홀로 서 있게 됐다.
"예쁜 옷은 아니어도 깨끗하게 갈아입었으면 됐으련만, 뭐가 그리 급하다고 후다닥 뛰어나왔을까. 그네 밀다가 어린이집 친구 엄마를 만나면 날 뭐라고 생각할까. 혹시 나한테서 소고깃국 냄새라도 나면 어쩌나."
내 안의 무수히 많은 눈들이 없던 후각까지 곤두세운 채 날 검열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아이는 신이 나서 폴짝인다. 날 검열한 그것들이 아이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헝클어졌군. 연분홍 티셔츠가 좀 낡아 보여. 티셔츠에 검은 자국은 초콜릿이야? 다른 엄마들이 우리 애들을 뭐라고 보겠어. 아이고, 큰일 났네."
당장 아이들 손을 붙잡고 집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더러운 티셔츠를 갈아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매만져 말끔한 모습으로 외출하고 싶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나로 보이고 싶었다. 칠칠맞지 못한 모습이 너무나도 창피했다. 토마토 얼룩을 손톱으로 긁어낸 후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본 몇 초의 순간은 나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엄마, 이것 봐. 진~짜 큰 담쟁이 잎이다!"
아이는 제 손바닥보다 큰 담쟁이넝쿨 잎사귀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해맑은 아이의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리기 시작한 아이의 볼록한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뿌듯함에 들썩이는 아이의 어깨가 춤을 췄다. 아이의 온몸에서 생기가 넘쳐흘렀다. 티셔츠의 초코 얼룩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와, 진짜 크다! 엄마 얼굴만큼 커!"
깔깔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티셔츠의 토마토 얼룩 따위야 문제도 아니었다. 지저분한 티셔츠 한 장이 아이들과 나의 반짝임을 가릴 순 없었다. 난 잎사귀 한 장에도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의 것과 같은 생기가 내게도 흐르고 있었다.
그런 순간이 있다.
흘러가던 일상에 커다란 돌덩이가 툭 하고 떨어지는 순간.
큼지막한 돌이 숨길을 막아버린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새로움은 보이지 않고, '좋지 않음'의 시선들만이 남는다. 나는 그 시선 안에 갇힌다. 순식간에 성벽은 세워지고, 철문은 굳게 닫혀버린다.
막혀버린 숨길을 트여주는 건 생기다. 차가운 물 한 잔,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 흔들리는 풀잎, 멀찍이서 들리는 개구리울음소리. 갇혀있는 나를 환기시켜 줄 수 있는 무엇이든 좋다. 흘러들어오는 생기에 가로막은 돌덩이는 흩어지고, 어느새 일상은 다시 흘러가고 있다.
아이들은 생기 그 자체다. 살아 움직이는 아이들, 제 것을 마음껏 표현하며 세상을 탐구하는 아이들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그런 아이가 둘이나 있다.
아이들 덕분에 알아간다. 그릇의 사소한 흠집이 그 안에 담긴 보석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음을.
난 그릇을 예쁘게 가꾸는데 노력을 다하며 살았다. 그릇 안의 보석의 눈부심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릇이 반짝이고 깨끗해야 그 안의 것도 그러할 거라 착각했다. 그릇을 보기 좋게 닦아내고 단장할 상황이 허락되지 않자 좌절했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그런 나의 믿음을 시원하게 걷어차 주었다. 자기들의 어여쁨을 보라고, 넘치는 활력을 보라고, 우리처럼 엄마 또한 그렇다고 끊임없이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