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이 없다'는 '의심할만한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뛰어넘는 지경에 이르다'라는 중간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측면을 뛰어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이가 밥을 잘 먹으니 당연히 잘 자랄 것이라 생각한다. 이건 인과관계에 따른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어느 순간 아이가 편식을 하면, 인과관계가 깨져버린다. A를 넣으면 A'가 나오는 것이 마땅한데, A를 넣지 않고 B를 넣으니 B'가 나올까 염려가 된다. 나는 B'(건강하지 않음)를 원하지 않는데 아이는 자꾸만 B(편식)를 고집한다. 여기서 아이를 향한 믿음이 깨져버리게 된다. '건강하려면 골고루 먹어야지'라고 아이에게 '한입만'을 강조하게 되고, 부정적 경험이 쌓인 아이는 식재료 탐색의 기회조차도 거부하기에 이른다. 내가 원한 것은 A(골고루 먹기)라는 행동을 하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C(식사 거부)라는 결과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구를 탓해야 할까. 애초에 편식을 시작해버린 아이를?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식사 시간을 무겁게 만들어버린 나를? 전자라면 아이를 쥐 잡듯 잡게 될 것이고(그게 아니라면 미움의 감정이 쌓이고), 후자라면 자책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때,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원인과 결과의 측면을 뛰어넘는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이가 정말 골고루 먹지 않는 것임을 관찰한다. 식사시간에는 밥만 먹을 수 있지만, 일주일 식습관을 정리해보면 5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밥에 현미만 조금 섞어도 섬유질을 섭취하게 되니까. 고기는 거부해도, 간식으로 소시지나 육포, 삶은 계란 등을 먹는다면 그것 또한 단백질 섭취니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영양제로도 채워줄 수 있다. 면밀히 관찰해보니, 식사시간에 정성스럽게 준비한 반찬을 거부하는 것이 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지, 아이의 영양소 섭취에는 큰 문제가 없다.
식사시간에 골고루 먹으면(원인) 몸이 건강하다(결과)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 조금 더 확장된 범주로 넓히면 새로운 관점이 올라온다. 아이의 건강에 염려될 상황이 없다면, 아이의 식사를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이의 건강 염려'라는 이유 뒤에 숨겨진 나의 진짜 감정을 들여다보아야 할 때인 것이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나의 마음, 좌절된 욕구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아도, 언젠가는 잘 먹을 것이며 균형 있게 잘 자랄 것이라 여기는 것.
아이가 당장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먹으면 원하는 목표를 성취할 것이라 여기는 것.
아이가 인사를 잘하지 않아도, 부끄러움의 단계를 넘어서면 사교성 있는 태도를 취할 것이라 여기는 것.
아이를 향한 믿음은 '세밀하고 폭넓은 관찰, 보다 넓은 지식(지혜), 안정된 마음'의 복합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믿음에는 관찰, 지혜,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믿음의 초기 과정에는 노력이 필수다.
상대를 판단하기 전에 관찰을 해야 한다.
나의 판단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워둔 기준을 점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고정관념이 깨진다.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라고 여겼던 부분들이 '관찰'이라는 과정을 통해 '아닐 수도 있구나'로 변하는 아픔이 동반된다. 사람은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욕구나 감정을 조절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확고했던 기준이 깨어지고 새롭게 정립되는 과정은 시원하기도 하지만, 과거의 경험들을 반추하는 과정이기도 하기에 쓰라릴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준, 보다 넓은 관점을 위해 지식 또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멘토의 조언, 강의, 책 등을 활용할 수 있다.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가 왜 이렇게 떼를 쓸까'에서 '아이의 언어발달과 정서발달이 균형을 맞춰가는 중이구나'로 관점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유를 알지 못하면 화가 나기 쉽다. 이해도 안 되는 일을 무조건 받아내려니 감정이 부대끼고, 이해가 되지 않아 하던 대로 하려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은 자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전문가와 먼저 가본 이들의 경험담과 조언은 그래서 큰 도움이 된다. 주의할 것은, 아이의 발달에도 '1+i'가 있듯이 취해야 할 정보에도 '1+i'를 접목해야 한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들은 도토리 키재기이기에 기존의 관점을 확고히 하는데만 도움이 되고, 너무 높은 수준의 이야기는 당장 일상에서의 실천이 어렵기 때문이다. 멈춰있다가 뒤로 밀리고, 퀀텀 점프하려다가 발목 부러진다.
가장 큰 산, '마음'이 남았다.
눈으로 보이고, 머리로도 알겠으니 '믿음'으로 옮겨버리면 끝인 일인데, 이게 그리 어렵다.
앞의 두 과정, 관찰과 지식을 통해 내가 추구해온 기준들이 새롭게 정리되었다. 눈으로도 알겠고, 머리로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는 대로 실천하려니 속이 부대낀다. 이유 없이 화가 나고, 마음이 상한다. 늘 떨어져 있는 바닥의 머리카락 한올에도 화가 치솟는다. 기준이 흔들리고 깨어지며 묵혀두었던 감정의 쓰레기들이 올라온 것이다. 사실은 아이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님에도, 눈앞의 가장 연약하고 안전한 존재(마음껏 화를 내어도 절대 날 공격하지 않고, 떠나지 않을 아이)에게 마음을 쏟아낸다.
흙탕물이 된 내 마음, 수면 위로 올라온 부유물들은 어떻게든 튀어나오려고 발악을 한다. 그렇기에 마음을 다스리고, 안정되게 하는 방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올라온 부유물을 꾹꾹 눌러봤자 같은 상황이 되면 더 큰 압력으로 튀어 오를 게 분명하다. 이미 올라와버린 감정들은 '너 때문이야. 네가 제대로만 했어도 엄마는 좋은 엄마 할 수 있었어.'라며 아이에게 던져버리지 말자. 오히려 '내가 이렇게 힘들었구나.'라며 감정을 수용하여 눈물로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지자.
화, 슬픔의 감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울리는 감정일 뿐이다. 화가 났다고, 눈물이 난다고 '나쁜 엄마, 나쁜 아이'라는 프레임으로 상황을 가둬버리지 않는 편이 좋다. 울먹거리는 아이에게 '엄마가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어. 큰 소리에 놀랐지? 미안해.'라고 사랑을 전하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자책하는 나에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목욕도 편하게 하지도 못했어. 난 너무 피곤했던 거야. 오늘 하루 많이 지쳤구나.'라고 위로를 전하자. 너도 그럴 수 있고,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인정은 안정된 마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상황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된다.
'아이를 믿는다'는 '나를 믿는다'와 같은 의미다.
'실수하면 안 되지. 피해를 주면 안 되지. 제대로 해야지.'라며 (타인이 중심이 된) 엄격한 기준에 맞추다 보면 나를 향한 믿음은 어느새 사그라든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음에도 '조금 더 해야지'라는 불안이 스스로를 잠식해버린다. 나를 향한 믿음이 사그라들고, 나와 동일시되는 아이를 향한 믿음 또한 두려움으로 대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