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통제가 느슨해지면, 아이의 자발성이 발휘된다.
완벽한 부모가 되기를 꿈꿨다. 내 아이에게만큼은 세상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힘닿는 데까지 최고의 것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 통제되지 않는 밑바닥의 마음까지 불완전했다. 양육은 기어코 불완전한 나를 직시하게 만들었다.
완벽을 꿈꾸었던 나는 불완전한 나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쌍둥이라서 그런 거라 여겼다. 몸은 하나인데, 돌봄이 필요한 아이가 둘이니 다 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똑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움직이는 누군가가 있으면 완벽한 육아가 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다음으론 알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따른 부모의 역할을 알면 가능할 줄 알았다. 아이 발달과 관련된 책을 열심히 읽었다. 부모 역할을 다룬 다양한 책들을 팠다. 육아를 공부하듯 배웠다.
마지막으론 내 부모가 나에게 준 상처 때문이라 생각했다. 받은 대로 준다는데, 나는 받은 것이 이 정도라 이것밖에 안된다 여겼다. 부모를 향한 원망과 분노만 토해내고 나면 완전무결한 나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순수한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다.
그 어느 것도 100% 완벽하게 성공적이지 않았다.
완벽을 꿈꿀수록,
완전한 부모의 모습으로 나를 채찍질할수록
육아는 꼬였다.
아이들은 부모의 완벽한 통제 안에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뭐 좀 할라치면, 이렇게 해보라 조언한다. 뭐 좀 쉬어볼라치면, 이거 하자 이야기한다. 뭐 좀 잘 놀고 있으면, 이거 더 해보자 그런다. 아이가 지금을 충분히 누리고, 다음을 생각해 볼 여유 없이 부모의 생각이 파고든다.
그렇게 아이와 부모의 실랑이가 끝나면, 부모는 지친다.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했다 생각하며 아이와 떨어져 할 일을 하려 한다.
부모의 규제가 느슨해지자, 아이는 재미가 생긴다. 이젠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마음껏 놀아보려는 마음이 생긴다. 부모에게 함께 놀자 이야기하지만, 부모는 이미 지쳤다. 좀 전까지 부모의 방식대로 놀았으니, 이젠 네가 혼자 놀아보라고 한다. 함께 놀자 조르던 아이는 혼자 놀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아이는 부모의 의도가 섞인 놀이가 재미없다. 처음에는 잘 따라주던 아이도 어느 순간 시들해진다. 부모와의 놀이에 자신의 자유의지가 완벽하게 구현되는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틈이 없다.
완벽한 부모가 되기 위해 아이의 마음을 100% 공감하고자 노력했다.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는 나를 탓하며 아이는 무조건 옳다고 바라봤다. 엄마로서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며 나의 욕구를 누르고 눌렀다.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맞췄다.
익숙해진 아이들은 '엄마의 여유'를 견디지를 못했다. 엄마도 쉬고 싶고, 엄마도 화가 날 수 있다는 알 수가 없었다. 만 세 살이 넘었고, 사회 기술을 익혀나가야 하지만, 완벽함을 꿈꾸는 엄마 아래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충분히 넘치게 받은 배려의 꽃을 피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완벽한 부모의 통제 안에서 아이가 성취감을 느낄만한 여지는 없다.
내가 세워둔 기준에서 나의 육아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도, 내 뜻과 달랐다. 내 몸을 반으로 쪼개어 움직인다고 해도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책으로 배운 육아는 현실에서 새롭게 적용되었다.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좀 익숙해질라치면, 아이는 한 뼘 자랐고 육아법은 업그레이드시켜야 했다. 모든 게 무의식 때문이라며 명상, 상담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 보았지만, 남는 것은 결국 나 하나였다.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과거의 늪은 나를 더 침잠하게 만들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 예의 바른 행동, 학업적인 성취까지. 꿈꾸던 육아의 모습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와버렸다. 완벽을 꿈꾸며 노력했던 행동들은 새로운 완벽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도 아팠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부모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아이 또한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아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조금만 더'를 부르짖으며 도달점의 결과를 보고 달려가던 레이스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육아에 실패했다.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은 자발성을 발휘했다.
짜인 틀 안에서 학습을 진행하려던 마음을 비우자, 아이들이 교구를 가지고 마음껏 놀기 시작했다.
노는 아이들 틈에 끼어 한글을 쓰고, 수를 읽어가던 행동을 줄이자, 아이들이 글자를 써 달라 이야기하고 스스로 쓰기 시작했다.
공감 언어를 줄이고 엄마의 영역을 주장하자, 스스로 배려와 타협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엄마의 틈'을 메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가 많다. 짜인 기준에 아이들을 완벽하게 맞추고 싶다. 그래야 아이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평온함을 누리지 못하고 찰나에 피어오르는 불안은 그렇게 나를 흔든다.
스며든 불안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을 때마다 이 두 문장을 기억해야지.
엄마의 실패는 아이들의 성공을 위한 틈이다.
틈이 있는 엄마가 되면, 아이들의 자유의지가 발현된다.
실패가 자연스러운 수용과 놓아버림이 되기를 소망하며.
틈을 허용하는 내가 되기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