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인 나는 여성학을 손대지 못한다.

by 자유로운 풀풀

나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성, 딸, 아내, 엄마, 교사, SNS 플랫폼 활용가.

가장 중점을 두는 페르소나는 '엄마'이다.


난 여섯 살 두 딸의 엄마이다.

임신 준비부터 지금까지 수년을 '엄마'에 집중하며 살았다.

'엄마'라는 역할을 자연스러운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아실현,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을 조금 떼어두고, '좋은 엄마, 보다 나은 부모의 역할'을 자리 잡게 하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모성이라는 과중한 역할이 나를 집어삼키려고 할 때쯤, 남편을 향한 불만, 사회를 향한 원성이 터져 나왔다.

왜 나만 이렇게 발버둥 치는 것이냐고 온갖 말을 퍼부었다.

자연스럽게 여성학에 마음이 꽂혔다.

억울함과 부당함을 사회학적으로 파헤치는 문장들에 넋을 놓았다.

딱 거기까지.


지금 나는 여성학에 손대지 않는다.

아니, 손대지 못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알면 알수록, 내가 깨뜨릴 수 없는 커다란 벽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발버둥 치려고 하면 할수록 사방에서 조여 오는 기분.

'그러려니'하고 넘겼던 것들이 단단한 유리 장벽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느낌.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 그 분야에 심각하게 몰입해버리는 나에게 여성학은 위험했다.

일상을 제대로 살아내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 '제대로'라는 표현 자체도 여성학에서는 물음표를 던지겠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며 전투 모드로 돌입해버리기에는 살아내야 할 순간이 다급했다.

구태여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속에서 들끓는 전쟁 언어들은 끄집어내 달라 아우성을 쳤다.


오늘 아침 여성학의 관점에서 쓰인 모성의 심리학에 대한 글을 읽었다.

예리한 문장들에 살갗이 아파왔다.

휘리릭 스크롤을 내렸다.


알아야 할 지식을 외면했다는 아픔.

알고도 모른 척 회피한다는 자괴감.

비겁하고 무능한 도망자라는 분노.

적절히 타협하며 나가기를 선택한 자신을 향한 자책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기장을 펼쳐 글을 쓰다, 브런치 창을 열고 다시 쓴다.


지금 나에게 먼저 중요한 것들을 해 나가는 중이다.


위로의 말을 건넨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고 한다.

'아직 나는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위로한다.

'언젠가 때가 되면 펼치리라' 생각한다.


책장 구석에 놓인 두터운 여성학 책 열두 권 위로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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