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탓을 하며 살아간다.
너 때문이라는 네 탓.
나 때문이라는 내 탓.
방향이 어디로 향하든 탓을 하며 살아간다.
오늘 난 탓을 했고, 탓을 들었다.
잠들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니들이 빨리 안 자서 엄마가 힘들다.'라고 탓했다.
같이 좀 있자는 내 말에, '당신이 실내 자전거 타라고 했잖아.'라는 탓을 들었다.
생각했다.
내가 아이들 탓을 하는 것은 타당하다 여기고, 남편이 내 탓을 하는 것은 억울하다 여기는 모순을 바라봤다.
아이들은 재밌게 놀고 있었다. 주말의 여운을 만끽하며 일요일 밤을 불태우고 있었다.
난 아이들을 재우는 게 귀찮았다. 졸리지 않은 아이들을 일찍 데리고 들어가면 잠자리 독서가 길어질 테니, 그게 싫어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최대한 아이들끼리 놀며 힘을 빼게 한 뒤, 잠자리 독서를 하러 들어갈 셈이었다.
'니들이 빨리 안 자서 엄마가 힘들다.'는 '애들이 자야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다. 읽던 책을 집중해서 마저 다 읽어버리고 싶고, 미뤄두었던 쓰고 싶은 글들을 얼른 토해내고 싶다. 듣고 싶었던 강의도 후루룩 수강하고 싶다. 읽기, 쓰기, 듣기의 활동으로 나를 비워내고 나를 채우고 싶은 거다. 아이들이 자지 않아 힘든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것이다.
나의 아이 탓은 타당하지 않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나의 욕구가 타당하다.
남편은 방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실내 자전거를 타다가, 힘들어서 안마기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난 아이들의 이런저런 요구 사항을 해결하며, 어질러진 거실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데, 혼자만의 시간을 거리낌 없이 갖는 남편을 보니 화가 났다. '저 사람은 참 내 덕을 많이 보는구나. 나도 저 사람 덕 좀 보자.'싶었다.
남편 앞으로 가서 말했다. 우리 옆에 좀 있으라고, 혼자 방에 있지 말라고.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자전거 타라고 했잖아.'라고. 순간 황당하였다. 식탁 의자에 앉아 폰 게임만 들여다보는 모습이 싫어서, 방에 들어가 자전거라도 타라고 한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억울했다.
'당신이 자전거 타라고 했잖아.'라는 남편의 말은 '난 그렇게 큰 잘못을 하지 않았어.'와 동의어다.
'우리 옆에 좀 있어.'라는 나의 말은 '당신은 왜 날 돌보지 않는 거야.'와 동의어다.
남편의 내 탓은 타당하지 않다.
그냥 좀 쉬고 싶은 남편의 욕구가 타당하다.
'남편이 잘못한 거야.'라는 나의 억울함은 타당하지 않다.
피곤하고, 쉬고 싶은 나의 신체적 욕구가 타당하다.
우린 탓하기에 익숙하다.
남 탓을 하면 남이 가해자가 되고, 내가 피해자가 된다.
내 탓을 하면 내가 가해자가 되고, 남이 피해자가 된다.
사실, 인간관계의 사소한 부딪힘에는 그렇게 따질 이유가 없다.
누가 잘못하고, 누가 피해를 본 것이 아니다.
서로의 욕구가 충돌했을 뿐이다.
이해관계가 부딪혔을 뿐이다.
부딪힘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게 된다면, 그건 상대 탓이 아니다.
내 안에 꾹꾹 눌러놓은 마음 덩어리다.
탓을 하면 편하다.
해결하지 않고, 덮어두고 욕하거나 욕 받거나 무시하면 되니까.
탓을 하지 않으면 좀 불편하다.
저마다 다른 요구를 적절히 조율하는 중용이 필요하니까.
일요일 밤 11시 2분.
두 딸은 공주놀이에 한창이고, 남편은 자기만의 시간에 한창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쓴다.
각자의 욕구에 충실한 이 시간.
이제 조율하러 가야겠다.
"얘들아, 잠잘 시간이야. 남편, 빨래 좀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