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엄마를 꿈꾸었다.
실수하지 않는 엄마, 아이를 수용하는 엄마, 단단한 엄마.
완벽하지 않은 내 안의 아이, 결핍이 있는 내면 아이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뭘 좀 할라치면 묵혀둔 감정들이 들끓어 일상을 뒤집어놓았다.
오늘 아침, 등원하는 아이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냥 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 순간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가 너무 성가셨다. 까탈스러웠다.
어릴 적 내가 들은 소리, 나의 못나 보이는 부분을 아이에게 투사한 것이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나니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
사과를 하려고 마음먹자, 다시 내면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굳이 사과할 일이 뭐 있어. 그럴 수도 있지.'
나의 실수가 있음을 정확하게 알지만, 그 실수를 덮어버리려는 감정.
끝까지 '내가 맞아.'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
침을 꿀떡 삼키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은이야, 엄마가 고함질러서 미안해. 엄마 마음이 급해서 화가 났어. 유치원에 가방 가지고 가는 게 맞아. 어디를 가든 필요한 물건을 챙겨야지. 내일은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잘 준비하자. 갑자기 화 내서 미안해."
쭈뼛거리는 아이.
차에서 내리는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완벽한 내면 아이가 있을까.
우린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불행한 내면 아이는 온전히 부모 탓이라 하고 싶었지만, 아니었다.
부모의 책임이 분명 있지만, 그것은 과거의 보호받지 못한 어린아이를 향한 책임이지 성인이 된 자녀를 향한 책임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아이의 관점 때문이다.
부모가 화가 나는 것이 모두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시선 때문이다.
부모 자신조차도 감지하지 못하는 투사 때문이다.
부모는 이런 사실을 몰랐기에,
때로는 사는 게 바빠 놓쳤기에
아이에게 제대로 비춰주지 못했다.
아이는 보호해줄 세상 유일한 안식처인 부모가 완벽하고 안전한 지대여야 하기에 '부모는 옳고, 내가 나쁘다'의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렀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알고 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과거의 어느 시점은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아이를 향한 투사로 다 집어던지기 전에, 알아차렸다.
아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내기 전에, 사과할 틈이 있었다.
과거에만 머물렀다면 사과하지 못했다.
세상 하나뿐인 나의 분신, 내 딸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사과를 미뤘을 것이다.
이해받고자, 수용받고자 하는 어린 마음은 어른이 된 내가 다독인다.
현실에 안전하게 수용받아야 할 내 딸도 내가 다독인다.
마음을 인정하되, 개선하면 좋을 행동을 안내한다.
완벽한 엄마는 없다.
완전한 내면 아이도 없다.
우린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는 나의 고유한 특성이 되고, 냄새가 된다.
스크래치들에 새살이 돋아 향긋함으로 채워지는 것은 지금 나의 몫이다.
상처를 지울 수는 없지만, 인정할 수는 있다.
상처를 없던 것으로 할 순 없지만, 회복시킬 수는 있다.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나를 손잡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일 뿐이다.
덧.
고속도로 휴게소에 잠시 주차 후 급히 쓰는 글.
이제 출발.
이 엄마가
내면아이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수용하며 육아를 시작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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