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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풀풀 Feb 19. 2023

바닥의 먼지를 닦다가 길어 올린 열세 살의 봄

오래간만에 여유가 넘치는 일요일. 이 주일간 바닥에 쌓인 책들을 책장에 가지런히 꽂았다. 보얗게 쌓인 먼지뭉치가 굴렀다. 


청소기를 꺼내 두 번을 밀었는데도, 흡입력이 약한 무선청소기인지라 시원치 않다. 바닥을 닦아본지 며칠이 지났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밀대를 꺼낼까 하다가 오래간만에 손걸레질을 해볼까 싶었다.


싱크대 하부장 서랍에서 손걸레를 꺼내 안방부터 차례로 바닥을 닦았다. 물건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바닥의 먼지와 이름 모를 가루들을 훔쳐내고 눌어붙은 자국을 걸레로 긁어냈다. 오래간만에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바닥을 문지르니 마음이 저절로 차분해졌다. 엄마의 잔잔한 마음을 읽었는지, 두 딸도 침대 위 난방텐트를 아지트로 꾸미느라 분주했다.


바닥을 두 평 남짓 닦아내면 먼지와 알갱이들이 한 뭉치였다. 속이 시원하면서도 이렇게 여유가 없었나 안쓰럽기도 했다. 시간의 쫓김 없이 물걸레 한 장으로 바닥을 닦고, 물걸레를 씻어 물기를 짜고, 다시 바닥을 닦아내기를 수차례.


불현듯 열세 살, 그 봄이 떠올랐다.




나의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방학, 내가 이제 막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은 섬의 면 지역 작은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직장을 새로 잡기보다 작은 면 지역에서 빵집을 열 생각이었던 아버지. 그때는 파리바게뜨가 지방으로 내려오기 직전이어서 소규모의 지역 빵집이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많은 인구가 살고 있진 않지만 (초등학교가 한 학년에 한 학급이며, 주변 면 지역을 통틀어서 학급의 학생수도 스무 명이 안되었으니. 지금보다 출생인구가 더 많은 시대임을 고려하면 아주 작은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지금 그 학교는 한 학년의 학생수가 열명이 채 되지 않는다.) 자본 없이 빚더미에 앉게 된 우리 집의 형편에는 부담이 없었던 곳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 집의 거실 너비만큼도 겨우 되려는 작은 상가(라고 하기에도 너무 작은 건물이었던) 한쪽에 빵집을 꾸리고, 상가 옥상에 조립식으로 지금 우리 집의 부엌 크기만 한 빵 공장이 만들어졌다. 냉난방시설이 되지 않는 옥상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빵을 만들고 나면, 잠시라도 한눈팔고 헛디디면 추락할 것 같은 가파른 계단으로 빵이 담긴 뜨거운 오븐을 내렸다. 고소하고 달콤한 빵 향기가 가게 안을 가득 메우고, 엄마는 분주한 손놀림으로 한 김 덜어낸 빵을 봉지에 담았다. 날이 좋은 날(거의 대부분)에는 상가 문을 활짝 열어두고 손님들을 빵향기로 유혹했는데, 사실 그 향기에 빵을 사러 오는 손님보다는 차로 1시간 이내의 논밭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새참거리로 빵 배달이 잦았다. 한 개에 300원 하는 단팥빵 일곱 개를 사면 이천 원을 받았던 에누리도 기억이 난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늘 우리 빵집에 들렀다. 빵집 이름도 *면 빵집. 살고 있던 면지역의 이름에 '빵집'만 덧붙인 소박한 이름이었다. 가게 안을 가득 메운 빵냄새에 취한 채로 갓 구운 생도나스를 입에 물고 집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우리 집은 주인집 아래에 딸린 조립식 건물이었다. 새시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로 1.5m, 세로 50cm 남짓의 신발을 놓을 공간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외삼촌이 수년 전에 사 주신 나무소파로 가득 차 있었다. 거실이랄 것도 없는 공간의 한쪽 귀퉁이에는 브라운관 티브이가 아슬아슬하게 올려져 있었는데 현관에 정처 없이 놓인 소파에 드러누워 만화영화를 볼 때면 그리도 행복할 수 없었다. (이사오기 전 까지는 어머니가 집에서 공부방을 운영하여 만화를 보다가도 학생들이 오면 내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소파에서 발을 내리면 가로 2m 세로 80cm 정도의 작은 거실 같은 통로가 있었고, 그 바로 앞에는 동생과 부모님이 잠을 자는 침실이었다. 거실의 왼쪽에는 간단한 세면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따뜻한 물은 잘 나왔던 것 같으나 욕실 문이 없이 시멘트벽으로 분리가 된 공간이 다였다. (화장실은 10m쯤 떨어진 마당의 감나무 옆에 있었다.) 거실 오른쪽에는 식탁 하나도 안 들어가는 부엌이 있었고, 그 바로 옆에 내 방이 있었다. 


난 내 방이 참 좋았다. 이전에 일 년 남짓 살던 집에는 내 방에 창문이 없었다. 문을 닫으면 칠흑같이 어두운 방이어서 난 종종 잠을 설쳤다. 열세 살에 만난 이 방은 작은 창문이 있었고, 창문 밖으로는 넓은 논이 펼쳐져있었다. 우리 집은 마을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내 방 뒤로는 집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해 지는 저녁에는 붉은 햇살이 내 방을 가득 메웠는데, 그 시간에 피아노 소품곡을 치며 혼자만의 흥을 누리던 게 나의 유희였다.


다른 손님이 잘 찾아오지 않는 우리 집. 난 그런 우리 집이 정말 좋았다. 화장실을 갈 때면 겁이 좀 나고, 머리를 감기에도 좀 불편했지만 햇살이 들어오고 펼쳐진 논밭을 담아내는 창문이 있는 내 방이 존재하는 우리 집이 정말 좋았다.


부모님의 빵집 운영은 꽤 바쁜 일이었기에,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함께 계시기 전까지 그 해 봄의 몇 달간 하교 후에 우리 집은 나만의 공간이었다. 나 혼자만이 누리는 작은 공간, 사치. 


이따금 기분이 좋을 때면 청소기를 꺼내 바닥을 밀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 조각난 네모 같은 거실인지 현관인지 모를 공간과 부모님의 방, 내 방, 그리고 작은 교자상 하나 놓으면 가득 차는 부엌을 청소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나의 공간을 내 손으로 만지며 닦아내는데 이유 모를 쾌락을 누렸던 듯하다. 나만이 아는 공간, 나만이 누리는 이 시간, 오후의 햇살이 데워준 공기, 햇살에 춤추는 먼지들. 햇살 속에 부유하는 먼지에 손을 뻗어 보이는 손 끝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다가 나도 모를 낯뜨거움에 얼굴을 붉히기도 했던 나의 열세 살의 봄.




결혼을 하고, 우리 집(아닌 회사집이지만) 바닥을 닦을 때면 열세 살의 그 봄이 떠오른다. 손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통제감을 누렸던 그 시간, 햇살이 들어오는 내 방 침대에 누워 라디오에서 녹음해 둔 유행가를 듣던 시간. 나만의 공간, 나만의 쾌락.


남서향으로 난 거실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고, 햇살의 자욱을 지워내며 물걸레질을 하며 나만의 감각을 길어 올렸다. 미뤄두고 묵혀두기만 했던 그 순간의 감각.


순간의 앞뒤로 이어진 맥락들에 가슴이 아릿하다가도,

그 순간이 있었기에 열세 살의 나는 즐거웠구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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