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나는 이상한 나라의 선생이 된 기분이다.
(선생이라는 이름 뒤에 '님'을 붙이고싶지는 않다. 교사라고 하기에도 직업적인 느낌이라 쓰고싶지 않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의 상호작용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펴본다는 의미로 '선생'이란 단어를 쓰고 싶다.)
아이들은 변화무쌍하다.
변화무쌍한 아이들의 세계는 정글이다.
아직 다 사회화가 되지 않은 저학년 아이들은 호불호가 극명히 드러나며, 강자와 약자의 포지션에 따른 태세 전환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선생질은 이런 아이들 사이에서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활동을 해야하고, 아이들의 학업이 성취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애써야하며,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음과 동시에 정서적인 지지까지 해주어야 하는 노릇을 포함한다.
이를 위해 칭찬으로 아이들을 조종하고, 선생의 구미에 맞는 행동을 유발하여 아이들을 쉽게 관리하는 스킬을 선보일 수도 있다. 상벌체계를 확실하게 만들어 행동주의 방법으로 조련할 수도 있다. 선생이 아이들 세계의 왕이 되어 아이들을 쥐락펴락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교실 풍경은 그렇지 않다.
난 교실에 선생이 있건 없건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상대를 존중하기를 바란다. 내 것이 소중하듯 상대의 것도 소중함을 마땅하게 여기길 원한다. 설사 아직 미숙한 감정처리로 불호의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나 상대의 감정을 다치게 하였더라도, 상대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겨누기보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행동을 수정해나가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
학업 또한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쉽다고 생각하는 교육과정은 아이들 입장에서는 아주 어렵다. 집에서 차근차근 예복습을 하지 않으면 누락되거나 정지된 연산에서부터 수학이 아닌 산수가 막히고, 독서교육이 차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업 시간 40분 동안 교과서를 활용하여 교육과정 성취기준에 도달하는 활동을 수행해내기가 어렵다. 학년이 뛸 수록 그 간극은 더욱 벌어져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멍한 시선으로 창 밖을 바라보는 아이가 1/3이 넘는다. 그런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주어진 시간 안에 주어진 텍스트와 활동을 소화시키기 위해 주의를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격차로 인해 경쟁으로 인한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런 감정에 휘둘리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작은 성취감을 쌓아가도록 하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정글 같은 아이들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두 눈을 꿈뻑거리며 선생 자리에 있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건 익숙하나
타인에 대한 존중이 빠진 채로, 행동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작은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감정 싸움은
때론 '선생질은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거기에 부모들이 가진 아이를 향한 믿음 뒤에 숨은 '방치와 유기'의 면모는
내가 서 있는 시공간을 부정하리만큼 나를 아프게 찌른다.
난 이상한 나라의 선생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뒤통수를 후려치듯 벌어지는 일들은
지금 나를 이상한 나라의 선생으로 만들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