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옳음과 친절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택하라.
옳은 것을 실천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정답이니까. 옳은 것은 정답이니 절대선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옳지 않은 것에는 분노했다. 어쩜 그럴 수가 있냐며 화를 냈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태도라며 억울해했다. 옳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친절 또한 옳은 것으로 증명될 때 행할 수 있었다. 친절함은 상대가 옳거나, 내가 원하는 바가 뚜렷할 때 행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옳음이 아닌데 친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양육을 시작하며 옳음과 친절에 부딪혔다.
우선, 아이에게 친절하기가 어려웠다.
내게 옳음은 정답과 같은데, 아이는 정답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육아서를 수십 권을 읽어도 내 아이는 육아서 속의 아이가 아니었다. 아이는 정답이 아니었다. 정답을 쥐고 있던 내게 아이는 오답 투성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기는 쉬우나,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라는 친절은 도무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나에게 친절할 수 없었다.
엄마라면 아이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이 옳음인데 그러지 못하는 순간이 많았다. 옳지 못한 행동을 반성하고 뉘우치고 새롭게 실천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감이나 친절 따위를 나에게 베풀 수 없었다.
답이 없었다. 애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의 문제 앞에 늘 부딪혔다. 이것이 정답일까, 저것이 정답일까를 고민하며 24시간을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대체 어쩌란 말이야."의 외침에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으니 말이다. 설사 하나를 택한다고 해도, 놓아버린 하나의 옳음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난 그렇게 죄책감의 구렁텅이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어제, 단지 내 실내놀이터를 걸어 나오던 중 연이가 은이의 팔을 밀었다. 감기 기운에 어깨가 짓눌리는듯했던 나는 연이의 돌발행동에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짓이야!"
엄마의 서슬 퍼런 고함소리에 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밀침 당한 은이도 주눅 들고, 밀친 연이도 입을 꾹 다문채 눈물을 머금었다.
후회할 여력도 없었다. 난 그저 쉬고 싶었고, 아이들이 좀 사이좋게 잘 놀았으면 했고,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했다. 주차장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머릿속에선 온갖 옳음들이 떠돌았다.
'왜 밀치는 거야 대체. 엄마가 피곤하고 힘들어 보이면 알아서 잘 놀아야지, 왜 투닥거리고 난리야. 지친다 지쳐. 그만 좀 하자.'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문장들이 성대 끝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 나를 다독였다.
'그래, 넌 피곤했어. 너무 피곤했어.'
차 문을 열고, 아이들을 태웠다. 주눅 들어 보이는 아이들. 그제야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니들도 많이 피곤했지. 은이는 연이랑 놀고 싶어서 연이 곁에 붙은 거고, 연이는 그게 귀찮았던 거지.'
옳은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친절이 필요했다. 아니, 설사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친절함으로 다가가 안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사과했다.
"연이야, 엄마가 고함지른 거 미안해. 엄마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러서 깜짝 놀랐지? 은이야, 엄마가 큰 소리 질러서 미안해. 은이도 놀랐지? 엄마가 너무 쉬고 싶어서 감정조절이 안됐어. 엄마가 앞으로 조심할게."
옳은 행동을 알지만, 매뉴얼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같다. 피곤하니 말보다 밀어내는 행동이 먼저 나간 연이나, 피곤하니 감정 실린 고함부터 먼저 나간 나나 똑같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옳음보다 친절이다. 무엇이 옳은 행동이냐, 무엇을 잘못했느냐를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음에도 놓쳐버린 당혹스러운 마음에 부드러운 태도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친절하다 :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하다.
고분고분하다 : 말이나 행동이 공손하고 부드럽다.
옳음과 친절 중 친절을 택하기를.
옳음의 잣대로 상대와 나를 재단질 하기 전에, 친절함으로 틈을 메꾸는 내가 되기를.
설사, 습관처럼 옳음을 선택하여 아이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나와 아이 모두에게 친절을 택하여 그마저도 보듬어 안는 하루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