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자'로 시작된 투정은 '피곤해'로 절정을 찍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피곤하다니까~ 피곤하다니까~'를 반복하여 외치는 아이. 징징거림과 고성이 뒤섞여 귀가 따가웠다. 급기야 연이가 내게 다가와 "엄마, 너무 시끄러워."라고 하소연을 했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엄마도 힘들어.'를 꿀꺽 삼켰다.
"응, 좀 시끄럽지? 은이가 많이 피곤해서 그런가 봐. 조금 기다리면 괜찮을 거야."
품에 안고 다독이니, 연이의 기분이 나아졌다. 다행이다. 둘 중 하나만 기분이 안 좋아야지, 둘 다 뒤집어지면 감당하기 어렵다.
은이가 침대에서 반쯤 내려와, '나 너무 피곤해~'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 앞에 마주 앉아,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0분의 시간이 흘렀지만, 3시간을 버틴 것 같았다.
'그만 좀 해!'의 익숙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이를 번쩍 들쳐 안고, 욕실로 들어가 거친 손놀림으로 양치를 시키는 장면이 떠올랐다. 엉엉 우는 아이의 등을 찰싹 때리며, '그러게, 엄마 말 들으랬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힘들다, 하기 싫다, 못하겠다, 피곤하다.'의 격정적인 표현은 허용되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 부모가 정해준 것들은 꼭 해야만 하는 착한 아이로 살아온 내가 보였다. '상황이 어떻든 해야 될 것은 군소리 없이 해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나'가 '지금 울고 화내는 내 아이' 앞에 서 있었다.
본능이 이성을 앞지르려는 순간, 나에게 질문했다.
아이의 감정은 옳은가?
은이의 감정은 옳다. (사실 감정에 옳고 그름은 없다.) 은이는 충분히 피로할 만했다. 아니, 왜 피로했는지 이해되지 않더라도 은이가 피곤을 호소한다면 피곤한 것이다. 엄마인 내가 '넌 지금 피곤하지 않아.'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이의 감각은 아이가 가장 잘 안다. 다섯 살 된 은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언어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다른 불편함이 더 있는 것 같다면, 은이에게 객관적인 언어로 물어보면 된다. 감정을 멈추라는 의도가 아니라, 너의 불편함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아이의 행동은 안전한가?
은이는 침대에서 몸을 뒹굴고 있었다. 연이와 부딪히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두었고, 은이는 신체적 피해를 주지 않고 온 몸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중이었다. 한 방의 분리된 공간은 아이들의 성향과 집안 상황을 고려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은이의 감정은 옳고, 행동의 경계 또한 분명했다.
은이가 스스로 감정을 추스를 수 있을 때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아이 스스로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세요.
육아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니 아이의 감정은 공감하되, 행동의 경계를 주라고 조언했다.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현실에선?
공감부터 안된다. 공감은 제쳐두고, 아이의 '노, 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부터 막힌다. 공감이랍시고 하는 말이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다. 아이의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어, 다채로운 방법으로 입막음을 하려 든다.
협상 : 그래그래, 알았다. 해줄게. 으이그.
협박 :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이제 그만 좀 해.
판단 : 그러니까 엄마 말대로 했음 됐잖아.
충고 : 담부턴 엄마 말 들어.
아이는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그것들을 처리해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인데, 엄마인 나는 그만 좀 하라는 말을 그럴듯하게 내뱉는다. '아직 어린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 부모인 내가 다 알려줄게.'라는 지독한 관념으로 아이 앞에 서고 만다.
사실, 부모인 나조차도 격한 감정을 끝까지 공감받아 본 적이 없기에 화라는 감정의 끝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이의 화, 짜증, 공포 등의 감정들을 끝까지 두고 보다가는, 내 아이가 망가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화의 끝 = 관계 파탄'으로 생각해온 내가 아이가 표현하는 격한 화에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의 감정이 두려운 것은 나의 몫이다.
아이의 인성이 망가진다는 것은 나의 두려움이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은 나의 오류인 것이다.
사실을 보아야 한다. 사실을 보기 위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책이 최선인가?
나는 무엇이 걱정되고 두려운가?
이전과 다른, 좀 더 나은 선택이 있는가?
저녁 7시 40분에 시작한 은이의 '피곤해 송'은 8시 15분에 막을 내렸다. 나는 35분을 잘 버텼고, 은이는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연이도 그런 은이를 사랑으로 기다려주었다.
"엄마, 나 치약 빼고 양치질할래."
은이는 내 품에 안겨 욕실로 들어가 양치질을 했다. 울음으로 피로함을 토해낸 아이의 표정이 맑았다. 품 안에서 양치질을 마친 은이가 몸을 일으켜 섰다.
"걸어서 갈 수 있겠어?"
"응. 이제 괜찮아."
마음이 이제 괜찮아졌다는 은이. 침대로 뚜벅뚜벅 걸어가, 연이 옆에 발라당 눕는다. 두 아이 사이에 누워, 잠자리 독서를 시작했다. 한 권, 두 권, 세 권. 저녁 8시 40분. 꿈뻑꿈뻑하던 은이의 두 눈이 지그시 감겼다.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잠들었다.
하루의 끝, 밀려오는 긴장과 피로를 다 토해낸 아이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감정을 막지 않고, 또 다른 화로 던져버리지 않은 나도 하루 끝이 말끔했다.
'10분만 더 참을걸.'하고 자책할 뻔했는데, '용케 잘 버텼다.'하고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망가질 것 같은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스스로 감정을 잘 추슬러낸 아이를 향한 대견함이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