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 끝, 화요일 아침. 눈을 뜨니 9시 10분이었다.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아이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9시 30분 오전 간식시간이니, 그전에 등원을 시키려고 했다. 어리둥절한 두 아이를 어린이집 현관에 들여보내려는 찰나, 담임선생님이 현관으로 내려오셨다. 아이들과 바깥 활동을 나가신단다.
"선생님, 오전 간식은 다 먹었나요?"
"네, 어머님. 오전 간식은 9시 20분에 끝나요."
이런. 빈 속으로 오전을 보낼 아이들이 염려되어 부랴부랴 나왔는데 오전 간식시간이 끝나버린 것이다. 난 정말 착각했다. 9시 30분에 간식을 먹고 10시에 오전 활동이 시작된다고, 어린 반 아이들의 스케줄대로 생각해버린 것이다.
쓰라린 경험 후, 결심했다. 아이들을 9시까지 등원시키리라!
수요일, 그러니까 오늘 아침. 7시 20분부터 울린 알람을 끄고 또 껐다.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시각, 7시 50분. 벌떡 몸을 일으켜 아침을 깨울 준비를 했다. 창문을 열고, 신나는 노래를 틀고,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다. 곤히 잠든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사랑스러운 손길로 아이들을 깨웠다. 여기까진 아주 좋았다.
시곗바늘이 9시를 향해가자 마음이 분주해졌다.
"빨리 나와. 시간 없어. 간식 시간 맞춰야지. 앞으론 엄마가 서두르라고 하면 서두르는 거야. 어린이집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곳이잖아. 깨울 때 일어났음 됐잖아."
변명을 해 보자면.
애들을 깨우기 위해 사랑을 다했다. 살랑살랑 어르고 달래며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되는 것(양치질, 세수, 화장실, 머리 묶기)만 진행했다. 그냥 좀 따라주면 좋으련만, 아이들은 '이 책 읽어줘, 이거 읽고 할래.'로 애를 태웠다. 그거 하나 들어줬음 나머지는 빨리빨리 움직여주지, 외출용 가방을 들고 갈 거라는 둥 시간을 끌었다. 주차장에서는 또 어땠나. 제발 좀 군말 없이 보통의 걸음으로 걸어서 차에 타 주면 좋으련만, '난 세상에서 가장 천천히 갈 거야.'라는 괴상한 논리를 들이대며 1cm의 보폭으로 걸었다.
참고 참고 꾹꾹 누르던 압력은 터져버렸다.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내 입에선 끊임없는 비난, 판단, 질책의 말들이 쏟아졌다. 1절만 하고 말지, 7절 8절까지 읊어댔다.
이미 아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챙기랄 때 빨리 움직이지, 그것도 안 해서 엄마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자식들'이란 극단적인 생각만 맴돌았다. 숨이 머리끝까지 턱턱 막혔다.
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이 시무룩했다. 평소와 사뭇 다른 온도. 풀이 죽어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어린이집 문을 나서는 순간, 아이들을 향한 미안함이 온몸을 두드렸다. 이왕 삼킨 거 끝까지 삼키지, 어쩌자고 다섯 살 아이에게 쏟아내었을까. 스스로가 한심했다. 다섯 살 아이보다 더 어린 엄마가 되어 아이들에게 퍼부어버리다니. 육아서를 그리 읽고, 자아성찰을 그리 해대 봤자 뭔 소용이 있을까. 현실에선 말짱 도루묵, 습관대로 퍼부어버리는 엄마인 것을.
죄책감이 독이란 것을 머리로는 알기에, 이 감정에서 어떻게든 한 걸음 물러나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난 나쁜 엄마야'라고 자책만 하다가, 아이들이 하원하고 나면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 같았다. 감정에 찬 물을 뿌려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밀리의 서재를 열어 '엄마'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했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오디오북 중에 마음에 끌리는 것을 골라 틀었다. AI 성우가 책을 찬찬히 읽어준다. 앞부분은 스킵하고, 뒷부분을 듣기 시작했다.
요지는 이거다.
엄마의 감정, 욕구를 알아차려라.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걱정되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배가 고파 활동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할까 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아이는 배가 고파서 예민해졌는데,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오해하고 아이를 좋아해 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내 아이가 어디서든 사랑받기를 원한다. 예쁘게 잘 자란 아이와 올바른 양육태도를 가진 엄마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당장 아침밥을 차려주진 못했으니, 9시까지 등원하여 제공되는 아침 간식을 먹기를 바랐다.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아이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기관 생활에 즐겁고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바란다.
감정과 욕구 이면의 오류를 점검할 차례다.
놓친 것은 무엇인가.
아이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아침을 먹지 않아도 괜찮냐고, 활동 중에 배가 고프진 않냐고 묻지 않았다. 아이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나의 자의적인 판단만 있었다. 아이가 배가 고팠다면 '배고파!'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허기가 져서 활동이 어려웠다면, 하원 후 '엄마, 유치원에서 배고팠어.'라고 말했을 것이다. 표현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면 물어보면 된다.
생각의 오류는 무엇인가.
배가 고파서 짜증을 좀 내었다고, 내 아이가 미움받지 않는다. 아이가 가진 장점들은 다 제외시켜버리고, 단 하나의 짜증에만 집중하는 꼴이다. 어른도 컨디션에 따라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그 속에서 사회생활을 배워간다. 아이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도움이 필요할만한 일이 일어났다면, 아이는 내게 말할 것이다. 그때 아이의 상황과 대처방법을 이야기 나누면 된다. 과대망상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하게 세팅된 아이와 엄마가 아니라, 잘 사는 법을 배워가는 아이와 엄마만 있을 뿐이다.
죄책감이나 남 탓에 벗어나, 새로운 행동을 설정한다.
1. 12시에는 자고, 7시에는 일어난다.
책을 더 읽고 싶어도, 글을 더 쓰고 싶어도 12시에는 자자.
2. 아이들이 먹든 먹지 않든, 아침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한다.
차려놓은 식사를 먹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배가 고프고, 필요하다 여겨지면 먹을 것이다. 부모로서 조언은 할 수 있다. "아침 차려놨어. 먹으면 에너지가 채워져서, 친구들이랑 더 신나게 놀 수 있을 거야."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다.
간식을 먹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던 건 엄마일 뿐이다. 아이들은 간식 섭취 여부보다 엄마와의 진한 교류가 더 고팠을 것이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몇 시간. 밥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듬뿍 충전하고팠을 것이다. 변명, 이유는 빼 버린 사과의 멘트를 준비해야겠다. "엄마가 아침에 화 내서 미안해."
엎질러진 물.
이미 쏟아져버린 물을 바라보며 '내가 왜 그랬을까'만 되새김질해봤자 소용이 없다. 지체되는 사이 물은 식탁보를 넘어서 바닥까지 흘러버리고 만다.
육아도 그렇다.
완벽한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완벽하지 못했던 한 순간을 꼬집어내어 '내가 왜 그랬을까' 땅굴만 파봤자 어쩌겠는가. '애가 그랬잖아, 남편이 그랬잖아.'라며 탓만 하면 뭐가 달라지는가.
우린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았음을 자책하는 사이, 후회의 먹물은 온 마음을 검게 물들여버린다.
하루를 지탱하도록 도와주던 나의 중심까지 파고든다.
죄책감이 나를 좀먹으려 할 때, 고개를 들자.
"이미 엎질러진 것을 어쩌겠어. 이젠 다르게 행동하면 되지."
감정과 욕구를 살펴보고, 숨겨진 오류를 점검한 후,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또 같은 실수를 하면 어떡하냐고?
괜찮다. 우린 신이 아니다. (신도 육아를 한다면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쿨럭)
잘못을 반복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새롭게 설정된 행동이 머릿속에 탁 떠오를 것이다.
이전의 교훈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며, 더욱 개선된 방식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후회만 하고 지나간다면 죄책감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후회를 넘어서 새로운 환경을 세팅한다면, 속도가 느릴지언정 육아의 선순환에 올라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