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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송인 Oct 05. 2019

같은 행동을 바라보는 두 관점

훌륭한 치료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담자를 복합적인 전체-약점뿐 아니라 강점을 지니고 있고 병리적 증상뿐 아니라 건강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잘못된 현실인식뿐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울 만한 현실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가슴을 통해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 정신분석적 사례이해, 8쪽.


작년에 상담자로서 상담 수퍼비전을 받으러 다닐 때, 경험 많은 한 수퍼바이저로부터 제 접근 방식이 마치 의사처럼 문진하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상담이 3회기밖에 진행되지 않은 내담자라 사례개념화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어서 기초 정보에 대한 탐색을 많이 했는데, 이런 부분이 수퍼바이저의 눈에 밟혔나 봅니다. 제가 사용하는 어휘가 너무 전문적이라는 등, 수긍할 만한 구체적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내담자의 강점에 관한 수퍼바이저의 표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어떤 말을 한 지 한참 후에 스스로가 했던 말을 번복하거나 정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것은 병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고의 틀이 잘 바뀌지 않는 경직성을 뜻합니다. 즉,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 사고의 틀도 변화해야 하는데 바뀐 환경에서도 이전 환경에 고정돼 버리니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증상의 다른 예로, 자기가 했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염려하다가 다른 사람 말을 놓치는 경우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약간 정정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내담자에게 저는 '네. 정정해도 돼요.'라고 답하면서 이것을 앞서 설명한 '사고의 경직성'이라는 증상의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수퍼바이저는 "'너가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구나'라고 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라고 피드백 해주었습니다. 한 현상을 관찰자 시점에서 병리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과 상담자가 내담자의 주관적인 마음 세계로 들어가 그 마음을 통해 바라보려는 노력의 극명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 같아서 울림이 컸습니다.


저는 임상심리전문가입니다. 병원, 특히 정신과에서 일하는 심리학자이죠. 정신과에 온 환자가 정신장애를 지녔는지, 지녔다면 어떤 장애인지 심리평가를 통해 감별하는 것이 주업무입니다. 병원밖에서 상담자로서 일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병원에서 심리평가하는 일이 주업입니다. 


한국에서 정신과 치료는 대개 약물치료입니다. 심리평가를 통해 정신장애를 감별하는 목적은 감별을 통해 보다 효과적인 약물 처방을 하기 위함입니다. 정신장애 진단은 DSM-5나 ICD-10이라는 진단체계를 통해 하게 됩니다. 이 진단체계들에는 각각의 정신장애 진단을 내리기 위해 충족돼야 하는 기준이 명시돼 있습니다. 특정 정신장애 진단을 내리기 위해 요구되는 증상의 종류와 갯수, 심각도 등이 언급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진단을 하는 것은 이점이 많지만, 그만큼 단점도 많습니다. 특히 환자의 내적 경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환자가 어떤 증상을 지녔는지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정작 증상이나 정신장애 진단 너머의 사람을 보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글 서두에 인용한 정신분석적 사례이해의 저자 낸시 맥윌리엄스의 말처럼, 내담자가 약점뿐만 아니라 강점을 지니고 있으며 병리뿐만 아니라 건강한 면을 지니고 있음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역경에 맞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탄력성이 환자나 내담자에게 있음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임상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발달과업일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없다면 사람을 보기보다 증상을 보기 쉽고, 병리적 특성에는 늘 건강한 측면이 내포돼 있음을 고려할 때, 병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서도 어려움을 경험하기 쉽습니다.


이 책은 정신장애 진단 너머의 사람을 보고자 하려는 노력을 주요한 동기로 하여 씌어졌습니다.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의 내적 경험은 무엇일까. 그것이 증상과 갖는 관계는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는 과정입니다.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의 내적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만 그 경험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고 싶었고, 이러한 바람을 동력으로 하여 2018년 4월에 시작한 글쓰기가 지금까지 현재 진행 중입니다. 


정신장애 진단은 여러모로 유용하지만, 정신장애 진단 때문에 정작 그 장애를 지닌 사람을 볼 수 없다면 그런 정신장애 진단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 저의 논점입니다.


한번은 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은 이 환자를 정신분열병과 분열정동장애 중 어느 쪽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턱을 어루만지더니, 깊이 고민한 듯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면 마이클 맥킨타이어라고 하겠네." - 몸은 기억한다,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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