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제주도 다시보기 2편
제주도는 동서로 약 73㎞, 남북으로 41㎞인 타원형 모양의 화산섬으로, 섬 중심부에 높이 1,950m의 한라산이 우뚝 솟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제주도는 섬 전체가 '화산 박물관'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화산 지형을 자랑한다. 땅 위에는 크고 작은 360여 개 오름(소규모 화산체를 뜻하는 제주어)이 펼쳐져 있고, 땅 아래에는 160여 개의 용암동굴이 섬 전역에 흩어져 있는데, 작은 섬 하나에 이렇게 많은 오름과 동굴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제주의 가치는 UNESCO 2002년 생물권 보전지역 지정을 시작으로 2007년 세계자연유산 등재,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까지 받았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으로, 제주가 국내뿐만이 아닌 해외 관광객에게도 많이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최근 가장 사랑받는 국내 관광지로 주로 알려져 있는 제주도지만 사실 멀게는 유배지였고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일본의 전투기 기지로 쓰였고, 가깝게는 많은 양민들이 학살된 4.3 사건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아픈 현장과 민중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추사 유배지가 있다. 제주도는 추사 김정희에게는 8년 3개월 지냈던 유배지였다. 추사 선생은 이곳에 머물면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내었다. 유배를 간다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낚시나 하면서 세월을 낚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제주도는 현세와 단절되어 원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던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이라면 TV, 인터넷, 스마트폰이 없는 고립된 섬에서 오로지 본인이 탐구하고 연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가 제주도가 아니었을까?
제주도를 좀 더 먼 기록으로 보면, 중국의 진시황 때로 올라간다. 진시황이 진나라를 건국하고 천하를 통일하자 불로장생(不老長生)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방사(房士:房事를 담당하는 관리)로 유명한 서복(西福:사기에 西市로 기록되어 있음)으로 하여금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금은보화와 여러 물건들을 큰 배 열 척에 나누어 실어 불사약(不死藥)과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러 보냈다. 서복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 즉, 한라산에 이르자 남녀 5백 명을 풀어 이 영약을 찾아오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제주도에서 신선이 먹는 열매로 알려진 암고란이라고 부르는 풀만 채집해 가지고 서쪽으로 돌아가면서 서귀포시의 정방폭포 절벽에 서서 서시과차(西市過此)라 새겨 놓았다. 서귀포라는 이름은 서시과차지포(西市過此之浦) 즉, 서시가 이곳을 지나간 포구라는 뜻으로 서과포란 한것이 서귀포로 바뀌었다고 하고, 또는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서귀포라 하였다고도 한다. 중국 관광객들이 오면 꼭 들리는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서복전시관이다.
우리나라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최초로 유럽에 소개한 글은 '하멜표류기'이다.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 스페르베르호의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던 중 일행 38명과 함께 표류하다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 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고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으며, 1567년 강진의 전라병영, 1663년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 동료 7명과 함께 탈출해 일본을 거쳐 1668년 귀국했다. 그해에 13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것을 바탕으로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道難破記)'와 '조선국에 관한 기술'이 실린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하멜표류기'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보고서로 쓴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하멜이 군역·감금·태형·유형·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였고, 남북의 여러 지역을 끌려 다니면서 당시 풍물과 풍속에 대한 사정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깊은 인상과 풍부한 경험을 잘 살려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의 존재를 유럽인에게 뚜렷하게 알렸을 뿐 아니라, 서양인으로서는 당시 한국의 사회실정과 풍속 ·생활 등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안덕면 사계리에 가면 하멜 비념비가 있다.
폐교였던 삼달분교를 개조하여 만든 '김영갑갤러리두모악' 미술관에는 어머니 젖가슴 같은 오름과 제주에 홀려 20여 년간 제주도만을 사진에 담아온 김영갑 선생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던 젊은 시절과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던 당시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제주도에 한라산, 성산, 산방산만 알던 우리에게 '오름'의 가치를 널리 알게 한 것은 모두 이분의 사진 작품을 통해서 접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여러분은 제주도 몇 개의 오름을 올라봤을까? 제주도에 360개의 오름이 있다고 하는데 오름만 다니는 여행자도 만나기도 한다.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엔 평생 사진만을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예술가의 애절함이 곳곳에 배어 있다. 홀로, 필름에 미쳐 돌아다니는 댕기머리가 낯선 사람들이 간첩으로 오인해 경찰을 부르기도 하고, 가수로 착각해 사인 종이를 내밀기도 했다고 한다. 한 10년 도 닦는 마음으로 찍자고 한 것이 비루먹어도 필름을 사고, 인화지 살 돈만 있으면 행복하기만 한 20년 세월 동안 제주 사진 수만 컷이 남았다.
올레길 소개영상 : https://www.jejuolle.org/office/kor/images/main/jejuolle_kor.mp4
제주도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든 것은 '올레길'이다. 올레길은 제주도의 트레일이다.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좁은 골목이란 뜻이며, 통상 큰길에서 집의 대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을 말한다. 언론인 서명숙 씨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2006년 걸었는데, 함께 걸은 영국 기자와 본국에 돌아가면 같은 길을 만들자고 약속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올레길은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관리한다. 2007년 9월 8일 제1코스(시흥초등학교에서 광치기 해변, 총 15 km)가 개발된 이래, 2012년 11월까지 총 21개의 코스가 만들어져 제주도 외곽을 한 바퀴 걸을 수 있도록 이어져 있으며 추가적인 알파코스 5개가 존재한다. 각 코스는 15 km 정도이며, 평균 소요시간이 5~6시간, 총길이는 약 425km이다. 주로 제주의 해안지역을 따라 골목길, 산길, 들길, 해안길, 오름 등을 연결하여 구성되며, 제주 주변의 작은 섬을 도는 코스도 있다. 길 곳곳에 상징물로 표시하고 있는 점과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는 것도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2010년 방문자가 27만 명인데 비해, 올레길의 2012년 방문자는 110만 명이다. 2012년 2월에는 일본 남단의 섬 규슈에 제주올레를 꼭 닮은 규슈올레가 열렸다. 규슈올레는 제주올레 브랜드가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해 만들어진 트레킹 코스로, (사)제주올레가 코스 개발자문 및 길 표식 디자인을 제공했다. 규슈올레는 웅대한 자연과 다양한 온천을 경험하며, 규슈의 문화와 역사를 오감으로 느끼며 걷는 트레일이며 2020년 8월까지 총 21개의 코스가 열려있다. 제주올레길이 있기 전에는 무엇인가를 타고 빠르게 보러 다니는 관광을 하였다면 제주올레는 느리게 걸으며 더 여유 있게 느끼고 담아낼 수 있는 생생한 진짜 여행으로 트렌드를 바꾸었다. 올레길이 개발되면서 많은 여행객들이 제주도에 그동안 닿지 않았던 구석구석 여행을 다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재래시장의 매출이 증가가 되고 올레꾼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이나 상품이 개발되어 지역 상권까지 활성화 되었으며 시외버스 이용객이 500%나 증가하는 등 제주도 경제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참고 및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