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접속> 리뷰
영화는 비를 피해 극장 앞에 서 있는 수현과 동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수현은 영화관에 갔다가 혼자 극장에 온 여자를 바라보는 민망한 시선이 불편해서 불이 켜지기도 전에 상영관을 빠져나온 참이다. 90년대는 그랬다. 혼자 영화관을 가기란 참 힘든 시절이었다. 요즘에는 영화를 편하게 보기 위해서 혼자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말이다. 그날 동현도 혼자 영화를 보고 나오는 중이다. 이렇게 수현과 동현은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스쳐 지나간다.
어느 날 PD로 근무하고 있는 동현의 방송국으로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가수의 희귀 앨범이 보내진다. 그 LP판은 동현이 대학 때 사귀던 여자에게 선물로 줬던 앨범이다. 동현은 새삼 헤어진 연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페일 블루 아이즈>란 노래를 라디오 방송에서 틀어준다. 그 시간 운전 중 그 노래를 듣던 동현의 옛 연인은 감정이 북받쳐 고의로 사고를 일으킨다. 그 사고의 순간을 아찔하게 비켜간 사람이 바로 수현이다. 같이 사는 친구의 남자 친구가 놀러 와서 수현은 집을 나와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사실 친구의 남자 친구는 수현이 먼저 알았던 사람이었고 오래전부터 짝사랑던 남자다. 우연히 동현의 프로그램에 주파수를 맞추어 <페일 블루 아이즈>란 노래를 듣고 있던 그 순간, 그녀의 자동차로 돌진하던 사고 차량을 가까스로 피하게 된다.
그날 이후 수현에겐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페일 블루 아이즈>는 마치 불운을 막아 준 부적 같은 느낌을 주는 곡이 되었다. 그래서 음반을 찾아 레코드점마다 찾아다니지만 워낙 희귀 음반이라 번번이 구하지 못한다. 그땐 그랬다. 요즘처럼 유튜브에 검색만 하면 온갖 종류의 음악을 다 들을 수 있는 시절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말이다.
동현은 대학 때 친구가 운영하는 레코드점을 방문해서 헤어진 연인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가 동현과 헤어진 건 동현 보다 먼저 사귀었던 남자가 군대에서 사고로 죽었기 때문이다. 이별로 인한 자살이라고 여긴 여자는 죄책감을 느껴 동현을 떠나갔던 거다. 이렇게 음반을 구하러 온 수현과 동현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두 번째로 스쳐가는 만남을 갖는다.
음악을 다시 듣고 싶어서 PC 통신 아이디로 노래를 신청한 수현을 옛 여인이라고 오해한 동현은 그녀의 아이디 '여인 2'로 메일을 보내게 된다. 수현은 동현과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동현의 헤어진 연인이 자신의 친구라는 거짓말을 하고는 통신을 이어 나간다. 그러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수현은 결국 거짓임을 고백하게 되고 화가 난 동현은 그녀와의 통신을 중단해 버린다.
수현은 자신이 왜 그 노래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적은 편지와 사과의 선물들을 방송국으로 보낸다. 폴라로이드로 찍은 사과의 문구가 그 당시 정말 신선했던 거 같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 이후 폴라로이드가 대유행하게 되었다. 필름 인화 작업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볼 수 있었고, 늘 흐릿해서 감성을 자극했으며, 게다가 세상에 단 한 장의 사진이라는 점에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폴라로이드에 열광했었다. 핸드폰 디지털 사진이 나오면서 이젠 우리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버렸지만.
그렇게 '폴라로이드 사과'로 동현의 마음을 풀어준 수현은 다시 통신을 이어 나간다. 낯선 사람과 하는 통신이지만 신기하게도 수현과 동현 모두에게 솔직한 대화의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수현은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동현에게 들려주고 동현 또한 6년 전 헤어진 여자에 대해 수현에게 터 놓고 이야기하게 된다.
수현은 동현의 충고를 받아들여 짝사랑 남자에게 마음을 고백하려 한다. 마침 그 남자는 수현의 친구와 다투고 헤어진 상태라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절호의 찬스였다. 그래서 그에게 고백하기 위해 포항까지 찾아간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마음속에 아직 친구가 남아 있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수현은 황망하게 서울로 돌아온다. 동현 역시 황망한 상태이긴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정만 앞세워 들이대던 방송 작가 때문에 방송국에 이러저러한 루머들이 생기고 선배 PD와도 사이가 틀어지자 동현은 방송국에 사표를 내게 된다. 졸지에 백수가 되어버린 동현은 수현에게 통신으로 배운 여러 가지 것들을 시도하면서 6년 전 이별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폴라로이드 사진도 찍고 밀린 집안 청소도 하면서 말이다.
안구건조증이 있는 수현은 짝사랑 남자에게서 받은 상처를 눈물 없이 참아내고 있다. 오히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인공 눈물이다. 수현도 새로운 취미나 집안일들을 시도하면서 사랑의 상처를 잊으려 한다. 소심한 자신의 성격을 탈피하고 싶어서 부분 머리 염색도 하면서. 그렇게 동현과 수현이 새로운 일상에 익숙해져 가고 있을 때 그들은 또 한 번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가는 만남을 갖는다. 둘 다 아직 얼굴을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걸 보면 둘의 인연이 보통은 아닌 거 같다.
동현은 자신의 옛 여인이 자동차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은 나라를 떠나 호주로 이민 갈 결심을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수현은 동현이 떠나기 전에 한번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다. 그땐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약속을 잡기도 마음을 전달하기도 참 힘든 시절이었다. 바쁜 이민 준비로 연락을 늦게 확인한 동현은 수현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나오지만 선뜻 그녀와의 만남을 결심하진 못한다. 자신이 선물로 준 '벨벳 언더그라운드' 앨범을 들고 있는 수현을 일찍이 알아봤지만 카페에 앉아 수현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한참을 약속 장소에 서서 동현을 기다리던 수현은 카페 공중전화로 동현의 집에 전화를 건다. 동현이 자신의 뒤에 앉아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자동 응답기에 수현은 왜 동현을 만나고 싶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수현은 몇 달 동안 동현과 통신을 하면서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삶의 위로가 많이 되었다는 마음을 전한다. 그래서 꼭 한번 만나서 같이 <페일 블루 아이즈>를 함께 듣고 싶었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다시 시작하기 두려웠던 동현은 수현의 전화 통화를 듣고 마음을 결정한다. 쓸쓸히 돌아가려는 수현 앞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동현. 둘에겐 어떤 말도 필요 없다. 그저 담담하게 웃으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수현과 동현... 그렇게 멋진 장면을 남기고 영화는 끝이 난다.
동현이 호주로 이민을 떠났는지, 수현이 그를 만나기 위해 호주를 방문했는지 이런 것들은 전혀 상관이 없다. 살다 보면 누구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을 함께 해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서로의 공허한 마음을 보듬어준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절로 남을 것 같다.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를 듣고 있으면 세상은 얼마든지 따뜻할 수 있고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마치 두 주인공의 충만한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