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린 Jul 02. 2022

왕가위가 그려준
90년대 젊은이의 초상

영화 <중경삼림> 리뷰


금성무 | 경찰 223


5월 1일 6시면 25살이 되는 경찰이다. 아미라는 여자 친구와 이별 후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4월 1일 만우절에 장난처럼 헤어져서 다시 만날 거라고 믿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와는 다른 것 같다. 아미와 헤어진 후 매일 밤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샀다. 마치 5월 1일을 그의 실연의 아픔에 유통기한으로 정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드디어 5월 1일을 하루 남겨 놓은 밤 그는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자와 운명처럼 만난다. 

                                                                                   


양조위 | 경찰 663 


언제나 경찰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늘 똑같은 시간에 순찰을 도는 남자. 저녁 식사로 늘 같은 메뉴를 시키는 사람으로, 양조위는 예측 가능한 삶을 선호하는 남자다. 그런 그 앞에 시끄러운 음악을 즐겨 듣고 인생의 계획 같은 건 전혀 중요치 않은 여자가 나타난다. 언제나 즉흥적이지만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는 이 여자는 이 남자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남자에겐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고 그에게는 그녀의 존재가 별 의미 없어 보인다. 그러던 중 남자는 여자 친구와 이별을 하게 되고 여자는 실연당한 남자의 주변을 계속 맴돌게 된다. 과연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남자에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뽑은 명장면들

  

01 | 때로는 낯선 사람이 더 편하다. 



이별한 슬픔과 외로움을 말하고 싶어서, 그 옛날 초등학교 짝꿍에게까지 전화를 걸었던 금성무를 위로해 준 건 4월의 마지막 밤, 난생처음 만난 낯선 여자였다. 마약 밀수 작업이 꼬여서 위기에 처한 임청하가 기대 쉰 사람도 역시 그날 밤 처음 만나, 귀엽게 작업을 걸어온 낯선 남자다. 살다 보면 가까운 사람들보다 낯선 타인들에게 더 솔직해질 때가 있다. 다시 또 만나서 어젯밤 고해성사에 껄끄러움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이 전혀 없는 존재에게서 받는 편안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가끔 지인들보다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서 오히려 더 힘을 얻는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02 | 이별의 아픔은 조깅으로 잊어요



이별을 할 때면 늘 조깅으로 슬픔을 잊는다는 주인공... 달리기를 하다 보면 몸 안의 모든 수분이 다 빠져나가서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된다는 주인공의 엉뚱한 발상이 예전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의 말은 맞는 거 같다. 단순히 수분을 몸에서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힘들게 괴롭혀야 생각들이 더 이상 자라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 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한 달 동안 사 모았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4월의 마지막 밤에 다 먹어 치운다. 그렇게 실연의 유통기한 정한 그는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또다시 달리기를 시작한다. 한참을 달려서 몸속 수분이 거의 다 배출했을 때쯤 남자는 더 이상 이별의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03 | 너무도 다른 두 남녀의 첫 만남



늘 단정하게 제복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상을 만들어 가는 남자와 계획된 미래 따윈 관심 없고 그저 순간의 감정과 즉흥적인 일상을 선호하는 여자, 이렇게 두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은 시작됐다. 너무도 다른 두 주인공의 성격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과 헤어 스타일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시작하기도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여자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남자에게 1년이라는 시간의 유예 기간을 준다. 남자를 동경한 여자는 남자처럼 변화하고 여자를 눈에 담기 시작한 남자가 여자처럼 변화하는 시간을 거치는 동안 그 둘 사이에 접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02 | 언제 사랑이 끝났냐고요? 



사랑이 진짜로 다 끝났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상 그 누구도 사랑이 끝났음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을 거다. 끝나버린 사랑을 애도하는 기간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하지만 언제 사랑이 끝났냐고 굳이 묻는 다면, 영화 속 양조위의 모습에서 찾고 싶다.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마주쳐도 웃으면서 안부를 묻게 되고, 멀어져 가는 지난 연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허탈하지만 그저 쓴웃음을 짓는 그때, 그 순간이 우리들의 사랑이 진짜로 끝난 시간이라고 말이다. 대사 없이 양조위의 얼굴 표정으로만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다 표현해 내는 이 장면이야 말로 이 영화 속 최고의 명장면이다.  


그래서 중경삼림은,


흔들리는 청춘의 초상



중경삼림은 90년대 청춘을 보낸 사람들에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영화다. 사랑의 불안함을 흔들리는 듯한 낯선 카메라 기법으로 표현한 왕가위에게 그 당시 청춘들은 열광했다. 80년대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 세기말적인 불안함이 감돌던 신간대에 감독이 보여준 새로운 방식의 사랑법이었다. 세기말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방황하던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푸른빛이 감도는 차가운 색감과 독특한 미장센으로 왕가위 감독만의 독특한 위로를 청춘들에게 선물해 주었다. 실연 당해 어쩔 줄을 모르는 금성무의 모습은 사랑 앞에 실수투성인 우리들의 모습이었고, 변해버린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양조위의 모습 또한 사랑의 실체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춘들의 초상화였다. 



쿨한 사랑을 강요받던 시절에도 이별은 아프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게도 90년대엔 신사랑법으로 '쿨한 사랑'이 새롭게 등장했었다. 90년대 초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로 유학을 떠났던 무수한 부유층 자식들은 학위나 경력보다 '쿨한 사랑법'을 찾아들고 왔다. 그래서 그 당시엔 이별 앞에서도 쿨함을 강요당했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촌스러운 관계가 질척거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황당하지만 오렌지 카운티에서 들어온 신사랑법은 그래야 한다고 강요했었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부족한 언어와 문화적 장벽에서 온 오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별은 늘 아픈 거고, 산뜻하게 정리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영어의 '쿨(멋지다. 끝내준다. 최고다)'의 용어를 오롯이 '차갑다'는 하나의 뜻으로만 이해한 오렌지족들에 의해 90년대의 사랑은 뜨거워도 안됐고, 질척여서는 더더욱 안됐다. 사랑이나 이별은 그냥 차갑고 가볍고 산뜻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한 신사랑법이 세련된 사랑이라 칭송받던 90년대에 왕가위의 중경삼림은 색체와 촬영 기법은 한 없이 쿨했지만, 사랑 그 자체는 절대로 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멋진 영화였다.



90년대를 관통했던 최고의 청춘영화


왕가위 감독은 '중경삼림'에서 이별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시간이 부리는 마술 앞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감정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90년대 최고의 청춘 영화, 사랑 영화로 아직도 기억된다. 그 시절, 청춘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왕가위에 열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사랑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박제되어 유통기한을 뛰어넘어 각인된다. 금성무가 생일 아침 낯선 여인에게서 받은 생일 축하 메시지가 그런 종류다. 단지 사랑이란 범주를 뛰어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건네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금성무는 그 기억에 유통 기한을 만년으로 매겼다. 


영화 속 금성무처럼 나도 '중경삼림'이란 영화에 유통기한을 정한다면, 내 기억의 유통기한을 '영원'으로 정하고 싶다.   


이전 06화 90년대로의 시간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