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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린 Jul 02. 2022

다시 쌓아 올린 첫사랑의 기억

영화 <건축학 개론> 리뷰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믿을 만한 걸까?


우리의 기억은 과연 얼마나 정확할까? 어린 시절엔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점점 들면서 내 머릿속 기억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가 재구성해 놓은 건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진실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똑같은 상황을 겪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에 따라서 다르게 각인되니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던 기억들도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 잊힌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주변의 매개물들의 도움을 받아 예고도 없이 우리에게 밀려든다. 기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 것들엔 여러 가지가 있다. 냄새, 사진, 음식, 음악...... 이런 것들이 머릿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을 다시 꺼내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 중에서도 잊혔던 시간을 오롯이 재생시켜주는 걸로는 음악만 한 게 없다. 


<건축학 개론>은 스토리도 멋진 영화지만, 관람 내내 흘러나온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란 노래 때문에 더욱 뇌리에 깊게 박힌 영화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영화 속 '서연'이 철길을 걷는 모습과 첫사랑을 표현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승민의 모습이 고스란히 재생되어 흐른다. 




삼십 대의 서연과 승민이 이십 대의 서연과 승민을 마주하다. 


이혼을 앞둔 서연은 제주도 고향 집을 찾는다. 아버지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라 서연의 옛 집은 황폐해져 버렸다. 그런 집을 부수고 새롭게 다시 짓고 싶은 서연은 스무 살 시절에 만났던 승민을 찾아간다. 마침 승민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건축 설계 일을 하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 것도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묻던 둘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서연의 집을 둘러본 후 승민은 재건축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지만 서연은 뭔가 계속 맘에 들지 않는다. 사실 승민은 서연을 대학교 1학년 때 '건축학 개론'이란 수업에서 처음 만났고 첫눈에 반했다. 게다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순진한 스무 살 청년 승민에게 서연을 운명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의 승민은 서연을 말없이 뒤에서 바라만 볼뿐이다.




건축학 개론 수업의 과제로 자신이 사는 동네를 사진으로 담고 있던 승민은 우연히 서연과 마주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올라와 정릉이란 동네가 낯선 서연은 승민에게 과제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고 그렇게 둘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된다. 과제인지 연애인지 모를 알 수 없는 만남을 계속하면서 승민은 점점 더 서연에게 빠져든다. 


영화 <라붐>에 '사랑은 헤드폰을 타고'란 유명한 장면이 있었다면 <건축학 개론>에선 '사랑은 CD 플레이어를 타고' 흘렀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지금 세대들에겐 음악을 듣기 위해서 저렇게 커다란 CD플레이어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는 게 믿기지 않겠지만 말이다. 서연과 승민에게는 그들만의 아지트가 있었다. 그 동네엔 사람이 살지 않는 오래된 집이 하나 있었고, 그 집이 바로 그 둘의 아지트였다. 그 집을 청소하고 마당의 꽃까지 심는 서연을 바라보면서 서연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점점 더 깊어가는 걸 승민은 깨닫게 된다. 하지만 천하의 숙맥에 소심남인 승민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몰라 괴롭기만 하다. 




서연은 자신의 생일에 승민과 함께 여행을 간다. 철길에서 누가 먼저 떨어지나 같은 오글거리는 게임도 하고 미래의 꿈도 서로 이야기하면서 꿈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와중에도 승민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해 여전히 우물쭈물, 안절부절이다. 그런 승민의 모습이 순진해 보여 귀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좀 답답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잠이든 서연에게 첫 키스를 하는 희대의 찌질남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시절의 감성으로 비추어 봐도 승민의 소심함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영화에선 이걸 그 당시 붐이 일기 시작한 강남 강북의 '지역 비교 문화'를 가져와 열등감이란 감정으로 형상화하고 있지만, 승민의 모습은 솔직히 지금 봐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집 짓기와 함께 새롭게 쌓여가는 추억들


공사가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승민은 건축 현장 옥상에서 잠이 든다.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서 정해진 기한 안에 집을 다 지어야 했던 승민은 늘 피곤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서연. 서연의 눈엔 헤어져야만 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안타까움이 흐른다. 사실 서연에겐 자신을 좋아하는 바람둥이 방송반 선배가 있었다. 예쁜 여자라면 한 번씩 집적대는 게 취미인 그 선배가 서연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건축학 개론' 수업 쫑파티에서 일부러 서연을 술에 취하게 만든 선배는 자취하는 서연의 집으로 같이 들어간다. 그 시간 서연의 집 앞엔 승민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에게 선물할 서연이 꿈꾸는 집 모형을 들고서 말이다. 서연은 분명 취해 있었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승민은 선배를 물리치고 서연을 부축해서 집에 데려다줬어야 한다. 승민이 보통의 남자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승민은 몰래 숨어서 그저 눈물을 흘리며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범죄 현장을 말이다. 그러니 세상 못난 머저리 찌질남이란 거다.


연락이 안 되자 승민을 만나러 찾아 나선 서연, 하지만 승민은 서연이 준 CD를 돌려주며 다시는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며, "꺼져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다. 세상 온갖 상처는 자신이 혼자 다 받았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이다. 근데 아무리 곰곰이 따져 봐도 서연이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신 죄? 아님 예쁜 게 죄인가? 오히려 더 큰 잘못은 술 취해 위험에 빠진 여자 친구를 방조하고 도망간 승민에게 있는 건 아닐까? 첫눈이 오면 만나기로 했던 약속대로 서연은 그들의 아지트를 찾는다. 하지만 그 시간 승민은 방에서 슬픔의 눈물만 흘리고 있다. 그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사랑에 배신당한 상처 때문에, 아니면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회한? 그렇게 서연은 오지 않는 승민을 기다리다 '기억의 습작' CD와 CD플레이어를 빈 집에 남겨 두고 떠나간다.




잘못 지어진 집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


어느덧 서현의 집 증축 공사는 끝이 났다. 마무리로 짐을 정리해주던 승민은 자신이 서연에게 주려고 만들었지만, 쓰레기 통에 버리고 갔던 집 모형을 발견한다. 그리고 왜 이걸 지금껏 가지고 있냐며 서연에게 화를 낸다. 그건 어쩌면 자신의 지질함으로 첫사랑을 맥없이 놓쳐버린 스스로에 대한 분노인지도 모른다. 왜 자신을 다시 찾아왔냐고 다그치는 승민에게 서연은 똑똑히 말해준다. 자신의 첫사랑은 승민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었다고. 이렇게 둘은 십 년도 훨씬 넘은 시간을 지나와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너무 늦게... 




서로의 마음은 확인했지만 그들은 이미 많은 길들을 지나왔고, 바꾸기엔 너무 늦은 현실들이 존재했다. 약혼녀와의 약속을 깰 자신이 없었던 승민은 고민 끝에 여자 친구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난다. 비행기 안에서의 착잡한 승민의 표정은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서연 역시 새롭게 지어진 제주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이들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서연은 아버지와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그런 서연에게 어느 날 소포 하나가 도착하고 상자를 열어 본 서연은 감동을 받는다. 그곳엔 서연이 첫눈이 오던 날, 그들의 아지트에 남겨 두고 왔던 전람회 CD와 CD플레이어가 들어 있었다. 승민은 자신의 말과는 달리 서연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잊지 못했던 거다. 서연이 승민을 찾아간 건 이혼을 앞둔 상태였다. 서른을 훌쩍 넘어 버린 나이에 자신의 집(삶)이 잘못 지어져서 무너져 내리는 게 슬펐던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승민을 찾아갔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생애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했었던 유일한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승민은 자기 연민에 빠져 첫사랑을 부정적으로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무너진 집을 다시 쌓을 수 있는 힘은,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보았을 거다. 세상에 나만 혼자라는 기분이 드는 그런 순간을. 그럴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줄 수 있는 힘은, 적어도 세상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아니 아꼈었다는 사실일 거다. 서연이 받고 싶었던 위로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돌고 돌아 너무 늦은 시간에 제대로 된 기억의 퍼즐을 맞추었지만 말이다. 


푸르른 스무 살 시절, 너무나 순수해서 실수투성이에, 바보 같은 행동들만 했더라도, 그 시절 서로를 순수하게 아끼고 사랑했던 기억만으로 서연에게 충분한 위로를 주었다.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을 충전할 만큼. 그리고 제 아무리 아픈 기억들이라도 지워버리기보다는 새롭게 다시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서연과 승민 모두 집을 지으면서 깨달았다. 



살다 보면 언젠가 또 커다란 파도가 몰려와 서연과 승민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과 환경을 잘 이해하고 지은 집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듯, 이해를 바탕으로 쌓아 올린 인관의 관계는 쉽게 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미처 마르지 않은 시멘트에 찍어 놓은 발자국처럼...... 불어오는 바람은 바람대로 맞이하고, 휘몰아치는 파도는 파도대로 받아들이면 지은 건물은 그렇게 단단하고 견고한 집(삶)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서연은 더 이상 삶이 두렵지 않다. 새로 지어진 집처럼 자신도 그렇게 단단해졌음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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