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의 끝 1

창작소설 - 다시 찾은 카를교 위에서

by 규린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삶은 어떨까? 너는 잠시 그런 삶을 그려보았지. 하얀 실의 움직임을 따라 익살을 떠는 마리오네트 공연을 바라보면서. 선택도 결과도 정해져 있는 삶을 잠시 부러워하며, 너는 공연장 카슈파렉(체코의 마리오네트 중 가장 인기 많은 캐릭터의 이름)의 익살스러운 몸짓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 어차피 선택지가 별로 없는 삶을 사는 거라면 누군가에게 조종되어, 공허한 노력을 하지 않는 쪽이 더 났지 않을까? 선택지가 별로 없는 삶은 너무 끔찍하니까 말이야.


가살스럽게 쏟아지는 햇살이 너의 생각을 끊어버렸지. 화살처럼 꽂히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는 순간, 노란 현기증이 네 눈 속으로 파고들었어. 오 년 전 이곳에 처음 왔던 날처럼. 여긴 어디지? 동공을 파고든 현기증이 온몸을 휘저은 뒤, 발뒤꿈치로 빠져나갔을 때야 너는 비로소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어.


그래, 너는 지금 젊은 예술가들의 메카, 카를교 위에 서있는 거야. 여기저기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상품들로 가득 찬 다리, 그 모두가 무명 예술가들이 빚어낸 작품들이더군. 조금이라도 비싼 값에 팔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전시된 예술품들 말이야. 그것들 탓에 너는 이곳이 어딘지 잠시 잊었던 거야.


이곳이라면 네 방에서 바래져 가는 그림들을 판매할 수 있겠단 희망을 품었던 까닭이지. 전시회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채, 습기 찬 반지하 방에서 마치 너를 조롱이라도 하듯 버석하게 말라 가는 그 그림들 말이야. 공모에 당선되지 않아도 비싼 비용을 치러 전시회 따위를 열지 않아도 이곳에선 당당히 그림을 팔 수 있나 봐.


블타바강의 석양은 크리스털 잔에서 찰랑이는 레드 와인처럼 출렁이고 있었어. 너는 노을을 받아 오렌지 빛으로 물든 강물을 넋을 잃고 봐라 보았지. 성 얀 네포무츠키 동상의 부조를 만지면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다는 전설은 틀리지 않았어. 적어도 네겐 말이지. 너는 다시 한번 차가운 동상에 손을 얹는군. 오 년 전 그날처럼 말이야.


그래, 그 순간이었지. 네가 오 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던 게.


“당신도 프라하에 다시 오고 싶군요?”


지구 반 바퀴나 돌아온 타국에서 들려온 모국어에 너는 잠깐 정신이 멍해졌었지. 그래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


“나도 이곳엔 꼭 다시 오고 싶네요. 석양도 아름답고 이 다리의 풍광은 정말 끝내주지 않나요?”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돌리니, 시원한 바람처럼 청량한 웃음을 짓는 여자가 내게 비켜 달라는 듯 눈짓을 했어. 비로소 정신줄을 잡은 너는 성상에서 손을 떼고 옆으로 살짝 물러 났지. 성상에 손을 올리며 생글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쏟아지는 햇살 보다 더 눈부셨던 건 카를교의 낭만이 빚어낸 착각이었을까? 그렇게 너의 모든 이상향을 온전히 담은 그녀와의 만남은 성상의 전설조차 미처 예고하지 못한 순간이었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 이곳에선 어떻게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걸까,라고 너는 생각 중이었지. 이런 걸 여기선 ‘카프카이스코’라 한다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맞닥뜨렸을 때, 이곳 사람들은 ‘카프카이스코’를 외친다잖아. 아마도 카프카의 기이한 작품들을 꼬집던 말이었을 거야. 그렇게 너는 운명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는 인연의 장난으로 이곳, 카를교 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었지.




마일드 세븐을 꺼내는 걸 보니 너는 지금 그녀를 떠올린 게 틀림없군.


“난 이 담배만 피워요. 유일하게 맛을 느낄 수 있어서.”


그녀와 구시가지 광장을 둘러보던 날, 독백처럼 중얼거렸던 여자의 말이 마치 무슨 주문처럼 들러붙어서는 너의 취향까지 바꿔줬지.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여자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래서 교사라는 자신의 직업도 굉장히 싫어했었잖아. 여교사와 담배라는 조합도 그리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지만. 그런 부조화스러운 여자의 행동에 오히려 네 맘은 더 끌렸어. 틀에 박힌 세상을 거부하는 것 같은 여자의 모습에 너는 묘한 감동까지 느꼈으니까.


그날 이후 마일드 세븐은 너의 애연초가 되었지. 나직하게 깔려 오던 여자의 말을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끌어오며, 넌 자신이 그녀에게 마일드 세븐 보다도 못한 존재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어. 입안 가득 퍼지는 알싸한 맛. 옛 노래가 지나간 시간을 되살려 주듯, 감각은 이미 사라진 존재를 네게 불러내는구나. 까만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담배 연기를 내뿜던 그녀가 담배 연기가 되어 너를 감싸오는군. 날씬하게 뻗은 팔다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모습이 떠올라 너는 서글프게 담배를 빨아들여.


너는 문득 담배로 손목을 지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 남자치고는 많이 가늘고 하얀 왼쪽 손목을 바라보다 필터까지 타 들어가는 담배꽁초를 가져갔어. 머리카락 타는 듯한 냄새와 함께 짧은 고통이 네 손목을 파고들지. 손목 위에 까만 재를 남긴 담배꽁초가 카를교 아래로 맥없이 추락하는구나. 왜 이제야 그녀를 이해하게 된 걸까. 동그랗게 흉터 진 손목을 보면서 너는 생각하는 중이지.


“살다 보면 누구나 하나쯤은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야. 이것도 그런 상처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네가 그녀의 손목에 그어진 하얀 줄을 만질 때면 갓 태어난 아기가 파악반응을 하듯, 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어. 그 순간 넌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지. 의사가 되길 바랐던 홀어머니 때문에 여자의 꿈은 의대 입학이었지. 공부를 잘했지만 수험장에만 들어서면 머리가 까맣게 변하는 이유로 여자는 삼수를 했었다고 해. 하지만 이과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여자는 마지막 수능날에도 강박증에 시달리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어. 삼수 끝에 남은 건 손목 위의 하얀 선과 그저 그런 대학, 그저 그런 학과의 입학증이었고. 다행히 임영고시에 합격해서 교사가 된 걸로 어머니를 겨우 만족시켰다는 말을 들으면서, 너는 그녀를 평생 옆에서 지켜줄 거라는 다짐을 했었지. 네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처지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