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의 끝 2

창작소설 - 사랑도 늙는다.

by 규린



“왜 결혼할 남자가 나일 수는 없는 거지?”


네 물음에 여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어.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오 년이면 나도 충분히 기다렸어. 기약 없는 네 성공을 엄마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잖아. 넌 사랑 없이 조건만 맞는 결혼생활을 할 자신 있어?”


너를 너머 아득히 먼 곳을 응시하던 여자의 텅 빈 눈동자가 잠시 동안 흔들렸지만 이내 평온해졌어.


“난 평생 엄마에게 실망스러운 딸이었어. 의대 진학에 실패했을 때처럼 말이야. 평생을 내 학원비 때문에 궂은일 가리지 않고 혼자서 고생한 엄마야. 그런 엄마의 마지막 소원이 남들 부럽지 않게 결혼하는 거야. 그리고 나도 더 이상 엄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엄마한텐 나뿐이니까.”


여자의 대답이 아니라도 너는 이미 알고 있었어. 너와 결혼하면 여자는 평생 궁핍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걸. 장모까지 한몫 챙겨줄 수 있는 그 남자와는 달리.


“그리고 이제 사랑은 그다지 중요치 않아.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함께 늙어간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연애 기간 내내 돈 안 되는 그림은 구석에 밀어 놓고 갖은 일을 다 해봤으니 말이야. 처음엔 그림으로만 돈을 벌려고 했어. 길거리에서 초상화나 케리커쳐를 그리면서 어떻게든 생활비를 충당해 보고 싶었지만, 그걸로는 턱 없이 부족했지. 그래서 커피숍 아르바이트부터 고깃집 아르바이트까지 닥치는 대로 뛰어들었던 거야. 심지어 물류 창고의 짐을 나르느라 밤새고 들어 가는 날도 다 반사였지.


여자는 처음엔 그런 너를 몹시도 안쓰러워하면서 네 손을 쓰다듬어 주었어. 손을 다치면 그림을 못 그린다는 싫지 않은 잔소리를 덧붙이면서 말이야. 심지어 돈은 자신이 벌면 되니 그런 일은 그만하고 여행이나 다니면서 작품 활동에 충실하자고도 했었어. 중학교 교사라 방학이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던 여자는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했었지. 그런 여자를 보면서 너는 늘 미안해했었지만.


처음엔 모든 게 다 순조롭기만 한 나날들이었다고 넌 생각하고 있군. 오 년 전 카를교 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너는 예술적 영감과 열정이 소용돌이쳤었지. 웃을 때 활처럼 살짝 휘어지는 눈을, 해사하게 빛나는 얼굴을, 뮤즈라고 하기에 손색없는 매끈한 몸을 보면서 마치 유명 화가라도 된 듯 머릿속엔 온갖 아이디어들이 날뛰었었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저쪽 가서 같이 초상화 그려요. 기념으로…”


그녀의 격 없는 제안에 넌 챙겨간 스케치북과 4B 연필을 꺼내며 대답했었어.


“내가 그려줄게요.”

“어머, 화가셨어요? 난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제일 부럽더라.”


여자는 네가 그린 자신의 모습에 무척이나 흡족해했어. 연신 신기한 듯 네 손과 자신이 그려진 그림을 번갈아 보면서 해사한 웃음을 지었었지. 그래서 너는 서울을 출발하면서 한 굳은 다짐은 단번에 깨고 말았어. 그림의 영감을 얻기 위해 철저히 혼자만의 여행을 즐길 거라던 그 다짐을.


그렇게 너희 둘은 연인이 되었고. 넌 영원히 여자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거란 허황된 희망을 가졌었지. 매끈한 허리를 들어내고 누워 있던 여자가 갑작스럽게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 말이야.


“나, 다음 달에 결혼해.”

“누구랑?”


처음에 너는 그저 여자의 말을 장난으로 여겼어. 모처럼 만에 캔버스를 내와 그녀의 나신을 그리던 너는 모든 동작을 멈춘 채 눈만 뻐끔거릴 뿐이었어. 마침 테레핀유와 물감의 비율이 맞지 않아 그림이 푸석푸석 뜨는 걸 보면서 잔뜩 신경이 곤두서려는 순간이었지.


“누구긴 남자랑 하지. 청첩장은 안 줄 거야. 네가 오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


갑자기 테레핀유의 냄새가 네 코를 찔렀어. 휘발성 강한 냄새가 역겨워 너는 눈살을 찌푸렸어. 그제야 너는 농담이 아니란 걸 감지할 수 있었지.


"그 그림은 결혼하기 전에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어처구니없어 붓을 떨어트린 너를 보면서 여자는 냉정하게 내뱉었었지.



저것 좀 봐. 다리의 난간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성상을 배경으로 두 명의 사람이 마리오네트를 조정하고 있어. 스페이블후르비네크라는 체코의 유명한 마리오네트 캐릭터가 음악에 맞춰 열심히 움직이는 것 좀 봐. 두 캐릭터는 서로 부자 사이래. 조정자들의 까닥 대는 손가락에 맞춰 열심히 움직이는 그 둘은 정말 환상의 콤비처럼 보이지 않아? 공연에 매료된 관객이 동전을 던져 주기라도 하면 그들은 더욱 신이 나서 익살스럽게 춤을 쳐대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형들을 보면서 너는 한 모녀를 떠올리고 있군. 언제나 어머니의 ‘바람’이란 조종 아래 함께 움직이는 그 모녀를 말이야. 여자도 어쩌면 저 마리오네트처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삶을 살았던 건 아닐까, 란 생각을 하면서.


공연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관광객들의 함성이 점점 커져가는군. 환호에 답하려는 듯 더더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부자를 바라보다, 너는 저 꼭두각시 인형들이 너 보다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어. 자신의 연주에 저토록 호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니 말이야.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너보다는 적어도 저 인형들이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인형들을 봐. 공연이 끝날 때마다 한 팔을 허리 아래로 내리며 근사하게 인사하는 것 좀 보라고. 인형술사의 손에 매달려 열심히 춤을 추는 마리오네트들을 넋 놓고 바라보다 너는 문득 이런 의심을 하게 되지. 어쩌면 여자가 스스로 결정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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