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 외로움이랑 친해져 봐
“엄마도 엄마지만 나도 이젠 좀 평온한 삶을 살고 싶어. 남들처럼 그저 그런 평범한 인생을 말이야. 아파트 하나 마련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고, 매달 아이들 학원비 걱정하며 늙어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이젠 너무 지쳤어.”
그렇게 너의 아름다운 뮤즈는 빛을 잃었구나.
“나랑은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건가?”
여자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너의 시선을 외면한 채 마지막 선고를 내렸어.
“응, 적어도 너랑은 그렇게 살기 힘들 거 같아.”
눈물은 흐르지 않았어. 하지만 너는 비굴하게 구겨진 표정을 여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지.
“나는 그렇지 않지만 너에겐 더 중요한 게 있잖아. 그림말이야.”
그녀가 너를 돌려세우며 말했어.
“이깟 그림 따윈 그만두면 돼”
여자는 자신을 뿌리치고 다시 외면하려던 너의 얼굴을 붙잡아 돌려선 부드럽게 쓰다듬었어.
“잠깐은 그림을 포기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대충 취업하고 결혼해서 살다 보면 언젠가 후회할 거야. 너의 잃어버린 청춘을 말이야. 그리고 하루하루 그리워하면서 살겠지 포기해야 했던 꿈들을. 난 네 꿈의 무덤이 되고 싶진 않아.”
여자를 처음 만난 이후 일주일이란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가 프라하에서 마지막 날이 찾아왔었지. 너희는 사랑을 속삭이느라 바빠서 차일피일 미뤘던 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를 보기 위해 구시가지에 갔어. 시곗바늘이 열두 시 정각을 가리키기까진 겨우 15분 밖에 남질 않았어. 너희 둘은 손을 꼭 맞잡고 잔뜩 기대에 차서 천문시계 오를로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지.
“신혼여행은 우리 꼭 여기로 오자.”
유난히 깊어 보이는 눈을 깜박이면서 느닷없이 여자가 말했지.
“뭐야? 이거 프러포즈야? 프러포즈는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뭐래, 무슨 프러포즈? 너랑 나랑 따로 올 수도 있는 거 아냐? 각자 결혼해서. 하하하”
놀려대듯 깔깔대는 여자를 보면서 너는 당연히 그녀와 함께 올 거라 다짐하고 또 했었지.
“저기 봐! 이제 나오고 있어.”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보니 작은 종소리가 울리면서 천문시계 위에 굳게 닫혀 있던 두 개의 창문이 열리고 있었어. 문이 열리자 드디어 열 두 사도들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인형들이 차례로 얼굴을 내밀고 사라져 갔어. 그 모습은 무척이나 희귀하고도 아름다웠지.
“그거 알아? 저 천문 시계를 프라하에서 아주 유명했던 천재 시계공이 만들었대. 그런데 막상 저 오를로이가 완성되고 나니 시의원들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다른 도시에 저 시계가 만들어지는 걸 원치 않았대.”
“왜? 이렇게 멋진 게 여러 개 생기면 좋은 일 아냐?”
그저 눈만 꿈벅이는 네가 한심하다는 듯이 여자는 혀를 끌끌 차곤 시계공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어.
“이렇게 아름다운 게 다른 도시에도 생기면 프라하의 명성이 아무래도 줄어들게 되잖아. 그리고 자고로 인간이란 뭐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신만이 독점하고 싶은 소유욕이 솟아오르기 마련이야. 꽃도 그래서 꺾는 거고. 결국 시의원들은 그 천재 시계공의 눈을 멀게 했대. 그래서 오를로이는 영원히 프라하에만 존재하게 되었고”
그때 너는 인간들은 어쩜 그토록 잔인할까, 란 생각했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너무 달떠서 그런 생각은 바로 날려버렸지만.
“나도 그래. 당신이랑, 당신 재능을 나만 혼자 독점하고 싶어.”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너무 달콤해서 너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간절히 바랐던 거야. 그날의 천문시계가 네게 그토록 몽환적이었던 건, 찬란했던 그녀의 고백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프라하의 석양은 오 년 전과 똑같이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캔버스처럼 찬란한 색으로 물들어지는구나. 붉은 장미 꽃잎처럼 하늘하늘 내려앉은 석양이 카를교 위에 소복이 쌓여가고 있어. 오렌지빛으로 물든 블타바강은 여전히 그때처럼 흘러가고 있지. 비록 네 눈에 담긴 풍경은 회색빛으로 바래져 가고 있지만 말이야. 너는 알고 있어. 저 흘러가는 강물은 오 년 전의 그 강물이 아님을.
눈을 감아 봐. 너는 여전히 검정 원피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여자가 떠오르니? 네 팔에 안겼던 가녀린 몸의 감촉, 뜨겁게 부딪혔던 말캉한 입술이 너를 여전히 휘몰아치게 하니? 그녀가 없는 삶을 넌 여전히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마리오네트는 그녀가 아니라 너 아니었을까? 그녀라는 줄에 매달려 있던 사람처럼 말이야. 아니, 그녀와 너는 운명 혹은 우연이란 줄에 매달려 연주했던 한 쌍의 마리오네트였던 건 아닐까. 카를교 위에서 춤을 추던 그 꼭두각시 인형들처럼 말이야. 여자만 네 곁에 있다면 조정을 당해도 행복하다는 미련을 너는 아직도 떨치지 못한 거니?
자 다시 눈을 떠봐. 너는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 거지. 설마 아직도 누군가에게 조정을 받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름다운 자태로 대지 위에 걸쳐 있는 저 카를교를 봐. 네 넋을 다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카를교도 할 수 없는 게 있잖아. 유유히 흘러가는 블타바강을 멈추지 못하는 거 말이야. 저 강물처럼 너와 그녀의 삶은 한 차례 격렬한 소용돌이를 휘돌아 지나온 거야. 이젠 고요만이 남아 쓸쓸히 흘러갈 일만 남았지만.
너는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오를로이는 시계공의 눈까지 멀게 하면서 유일무이하게 박제해 놓았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남았다는 말을. 고달팠지만 눈부셨던 시간을 더 이상 낡아지기 전에 박제하려 했던 여자의 선택을 너는 이젠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군. 이제 서야 너는 오 년 전 서울을 떠나면서 다짐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어.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겠단 다짐 말이야.
너는 외로움과 좀 더 친해질 필요가 있어. 그렇게 외로움과 친해지다 보면 혹시 알아, 진짜로 멋진 그림을 그릴 날이 올지. 이런 말이 있지. 그림은 멀리 서 볼 때 더 아름답다고. 사랑도 그렇고, 우리들의 인생도 멀리서 볼 때 더 아름답지 않을까?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 누군가에겐 네 삶도 적당히 멋진 풍경일 수 있어.
자, 이젠 너의 인생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봤으면 좋겠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네 삶을 말이야. 이제 네게 남은 건 단 하나뿐이군. 천재 시계공까지는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려봐. 항상 널 응원해 줄 테니.
해가 완전히 넘어간 카를교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어. 이봐,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어때, 오늘은 정말 긴 하루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