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 일상도 낡아간다
"하율아, 그만 좀 해. 어? 하율아!"
세 살배기 하율은 놀아 줄 사람이 없다고 징징대며, 설거지하는 지영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좀 있으면 언니가 어린이 집에서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저기 있는 블록 갖고 놀아. 엄마 지금 설거지하고 있잖아."
지영의 말을 들은 하율은 더 세게 다리를 끌어안는다.
"시러~, 하유리 디금 팀팀하다고~"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시작되는 육아에 오후가 될 무렵이면 지영은 늘 파김치처럼 늘어져 버린다. 설거지를 방해하는 하율을 내려다보는 지영의 눈엔 슬슬 짜증이 담기기 시작했다.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집안일과 육아를 해도 늘 시간은 부족했고 하루하루는 어느새 후딱 지나가버렸다. 두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겨우 한 시름을 놓는 삶,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싶어 지영은 그저 한숨만 지을 뿐이다.
거울 한 번 제대로 볼 시간 없다가, 늦은 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곤 지영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거울 속엔 무슨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늘어진 티셔츠룰 걸치고, 무엇보다도 생기를 잃은 눈빛을 지닌 초라한 한 여자가. 결혼 7년, 육아 5년 차인 지영은 매일 밤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녹초가 된다. 남편은 오늘도 또 늦나 보다. IT 스타트업 회사의 과장인 남편은 잦은 야근과 주말 특근까지 했다. 지영이 한참을 현관문을 노려보고 있을 때 '띠리리릭' 비번 눌리는 소리가 드리곤 남편이 들어왔다.
"당신 혹시 아이 봐주기 싫어서 이렇게 매일 늦게 오는 거야?"
"뭔 소리야. 회사 일이 바쁜 거 뻔히 알면서."
피곤해 죽겠는데 또 트집을 잡는다는 표정으로 남편은 지영을 바라봤다. 지영이 뭐 특별한 기대를 한 건 건 아니었지만, 남편의 대답은 오늘도 똑같이 무미건조하고도 뻔해서 화가 치밀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위로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육아에 지친 지영의 유일한 숨구멍은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의 줌바 댄스다. 일주일에 세 번, 아침 10에 참여하는 그 한 시간이 그녀에겐 산소 호흡기와 다름없었다. 열정적인 라틴 음악에 몸을 맡기고 땀을 흠뻑 쏟아낼 때, 지영은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 시간도 아직 어려서 어린이 집에 익숙하지 않은 하율을 겨우 달래서 오전반만 보내고 나서야 얻은 값진 시간이었다.
줌바 댄스가 그토록 기꺼운 데엔 유난히 열정적으로 가르쳐주는 줌바 강사 이준호의 영향도 컸다. 서른 중반쯤 돼 보이는 준호는 적당히 그을려진 탄탄한 몸과 서글서글한 웃음이 보기 좋았다. 어쩌다 수업 시간보다 일찍 가면 헤드셋으로 음악을 들으며 오늘 나갈 동작을 혼자 춰 보고 있었다. 큰 키에 기다란 팔다리를 움직여 열심히 예행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영은 그에게 처음 호감을 느꼈다. 자기 일에 열중하는 남자에 대한 동경과 같은 그런 감정을. 수업이 시작되고 음악에 완전히 몰입한 채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선, 잊고 살았던 연애 시절의 설렘까지 되살아났다. 파이팅 넘치고 정열적인 준호의 모습에서 지영은 세상의 무게를 벗어던진 듯한 자유로움 마저 보았다.
줌바 댄스 수업이 계속될수록 지영은 준호가 점점 더 맘에 들었다. 남편을 처음 만나 썸을 타던 시절처럼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리기까지 했다. 여느 때처럼 잔뜩 설레는 마음에 들떠 수업에 갈 준비를 하던 지영은 갑자기 보채는 하율 때문에 난감해졌다. 무슨 이유인지 오늘따라 어린이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는 하율을 보면서 걱정보다 조바심이 앞선다는 걸 깨닫자 지영은 잠깐이지만 죄의식이 들었다. 하율의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조금 나는 것 같았다. 지영은 잠시 고민을 하다 보채는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이곤 꾸역꾸역 어린이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지영은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며 곧장 줌바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커뮤니티 센터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수업이 시작하고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조심 들어가다 지영은 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눈꼬리를 활처럼 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은 마주 보면서 그녀는 준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이 뛰면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달래며 동작을 따라 하던 지영은 그만 스텝이 엉켜 엉뚱한 동작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준호는 음악이 잠깐 멈춘 틈을 타서 지영에게 다가왔다.
"지영 씨! 괜찮아요? 에너지가 너무 넘치면 발이 꼬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는 말을 하며 달콤하게 웃어주었다. 이 순간 지영은 그가 자신을 다른 회원들보다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마치 그린 라이트 신호를 받기라도 한 듯이.
며칠 뒤, 락커룸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지영에게 준호가 다가왔다.
"오늘 그 메링게 동작, 정말 멋지게 잘하시던데요. 특히 지영 씨는 표정이 정말 밝아서 좋아요. 다른 분들은 육아 때문에 힘드신지 지친 표정인데, 지영 씨는 매일매일 더 어려지시는 것 같아요. 하하하."
이 지극히 사적인 칭찬은 지영의 마음에 결국 불을 질렀다. 남편에게서 도통 들어보지 못했던 칭찬과 인정이었다. 그녀는 준호의 눈빛, 작은 미소, 격려 한 마디를 관심의 증표로 해석하며 점점 더 그에게 빠져들었다. 줌바는 이제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그녀가 현실의 메마름에서 도피해 멋진 애정을 그려가는 통로가 되어버렸다.
밤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지영은 잔뜩 들뜬 기분으로 물었다.
"오늘 줌바 강사가 나보고 나이보다 훨씬 에너지가 넘치고 어려 보인대. 당신이 보기에도 그래?"
민준은 피곤해서 숨 쉬는 것조차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 누웠다.
"뭐? 뭐라고?"
"됐네요. 그냥 잠이나 자세요."
삐죽 내민 지영의 입가엔 외로움만 단단히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