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일상의 평온은 퇴직금이 줄어드는 속도에 비례해서 사그라들었다. 생활비와 예은이의 막대한 병원비가 목돈을 갉아먹는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래서 나는 점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돈을 어떻게든 굴려야 하는데. 돈이 다 떨어져서 예은이의 치료를 못하게 되면 안 되니까.'
나는 이리저리 금융상품이나 주식투자 같은 걸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대학 시절 나를 유난히 이뻐해 주던 선배, 태호 형이 떠올랐다. 요즘 금융가에서 엄청 잘 나간다고 동창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했다. 유일하게 내게 살갑게 굴던 선배였다. 집회에 참석하기 싫다는 나를 다른 선배들은 다 싫어했었다. 은근히 따돌리거나 외면하던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태호 형만은 늘 나를 챙겨주려 했었다. 태호 형은 자본주의를 혐오하던 80년대 학번, 운동권 출신의 전형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졸업 후 금융계에 진출했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동창들도 크게 성공해서 엄청난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는 다들 줄을 대고 싶어 안달을 냈다.
"명준아!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꿔야 하지 않겠냐! 나중에 네가 이 사회의 기득권이 되더라도,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20대의 태호 형은 그렇게 외치며 앞장서서 정의를 부르짖던 투사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난 늘 싫었었다.
'나 하나도 바꾸기 힘든데 뭔 세상을 어떻게 바꾼다는 건지......'
나는 태호 형이 빨리 철이 들길 바랐다. 그래서 태호 형을 찾아가는 게 영 마뜩지 않았다. 하지만 내 처지를 아는 동기들이 태호 형이라도 만나보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도 있어 난 한 번쯤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자 정보라도 들어두면 손해 나는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에서.
태호 형을 만나 나의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마침 아주 잘됐다는 듯 기뻐하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명준아, 걱정 마. 내가 아는 좋은 펀드가 하나 있어. 곧 상장할 건데 최소한 세배는 먹을 수 있는 상품이야. 네가 평생 은행에 갇혀 고생했으니, 이제 좀 쉬면서 돈이 굴러가서 일하게 만들어야지."
나는 태호 형 말이 처음엔 미심쩍었지만, 계속되는 프레젠테이션 앞에서 점점 공감하게 되었다. 워낙 확신에 차서 말하는 선배도 선배지만, 자꾸만 어른거리는 예은이와 민준이를 생각하며 큰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나는 퇴직금의 대부분을 그 펀드에 투자했다. 태호 형은 몇 달 뒤면 눈덩이처럼 불어날 자금과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하면서 증서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투자를 한 지 두 달이 지날 즈음에, 불안한 소문이 들려왔다. 지수가 아줌마들 '맛집투어' 모임에서 대규모 사모 펀드 사기 이야기를 듣고 온 거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혹시나 싶어, 급히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나는 곧장 펀드 사무실이 있는 강남 빌딩으로 달려갔다.
호화로웠던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버렸고, 유리문에는 프린트된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본사는 사정상 폐업하였음을 알립니다.’
주변에는 이미 나처럼 넋이 나간 사람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사모펀드 사기였다. 청춘을 바쳐 일한 대가가, 가족의 유일한 안전망이었던 전재산이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 와중에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펀드를 조성한 핵심 멤버들이 바로 80년대 학번의 우리 과 선배들이었다는 것이다. 한때 사회를 바꾼다고 외쳤던 그들은, 이제 타인의 피 같은 돈을 강탈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눈에서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절규가 목구멍을 후려쳤다. 나는 주먹으로 닫힌 문을 쾅쾅 내리치며 소리쳤다.
"강태호! 이 개자식아! 내 돈 내놔! 예은이 치료비 내놓으라고!"
내 처절한 외침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내 곁엔 나처럼 돈을 사기 당한 몇몇 사람들이 주저 않아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법도 공권력도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나는 늘 혼자가 좋았다. 혼자서 점심을 먹고, 혼자서 취미 생활을 해도 전혀 아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처럼 집단의 힘에 기대지 않고, 철저히 개인의 능력과 성실함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랬던 나였다. 그런 내 삶이 이렇게 집단의 탈을 쓴 공공연한 사기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릴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지연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내의 눈빛은 증오와 절망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 태호를 욕하면서 발작처럼 울던 그녀는 조용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커다란 케리어 가방 두 개를 가득 채운 아내는 예은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떠났다. 엄마가 집을 나가는 데도 민준이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어둠이 점점 내려앉았다. 불도 안 키고 소파에 앉아 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젠 진짜로 철저하게 홀로 남겨졌다고.
텅 빈 식탁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최소한 '동지'라는 울타리를 공유했다면, 나는 언제나 고독한 개인이었다. 직장을 잃었고, 돈을 잃었고, 결국은 가족까지 해체되었다. 고통과 서러움이 뒤섞인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묵묵히 성실하게 살기만 하면, 내 영역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여쁜 아내와 사랑스러운 자식들을 키우며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개인의 삶은 거대한 집단의 만행 앞에 너무 연약했다.
창밖의 거리는 여전히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지만, 이 집은 더 이상 편히 쉴 수 없는 쓸쓸한 폐허가 되었다. 내 청춘을 바쳐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렸다. 내게 남은 것은 오직 고독과 절망뿐이었다. 자신만에 방에 갇힌 민준처럼 나도 이젠 이 쓸쓸한 집에 갇혀 버렸다.
'이제 뭘 어쩌지, 내가 뭘 해야 하냐고?'
다시 시작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세상과 싸울 힘은 더더욱 없다. 90년대 학번이 외쳤던 '자유로운 개인'은 결국,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엔 가장 고립된 존재라는 슬픈 진실을 깨달았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으며 절규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냐고! 난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불 꺼진 집안엔 눅눅한 어둠만이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