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2

창작소설 - 지영이 잃어버린 것은?

by 규린


회원들의 오랜 바람인 뒤풀이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지영도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리였다. 며칠 전부터 남편에게 오늘은 일찍 와서 아이들을 봐 달라는 약속을 꾸준히 상기시켰다. 다행히 남편은 일찍 퇴근했고, 식탁에 이것저것 반찬을 차려 놓은 후 외출 준비를 했다. 모처럼만에 화장을 곱게 하고 집을 나서는 지영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수업 밖에서의 준호 모습을 상상하니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술자리의 분위기는 지영의 기대와 달랐다. 준호는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특히 민희라는, 늘씬하고 예쁜 미혼 여성 회원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민희가 좋아하는 인디밴드 이야기를 할 때, 준호는 눈을 반짝이며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은 같은 싱글이라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 거 같았다. 준호는 민희에게 술잔을 건네거나 안주를 챙겨주는 등 노골적인 친밀함을 보였다. 지영은 점점 투명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지영의 마음속엔 시커먼 질투심과 극심한 굴욕감이 마구마구 솟구쳐 올랐다.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 그의 칭찬은 그저 모든 회원들에게 하는 영업용 립서비스였을 뿐이야.'


지영의 머릿속은 '사랑받고 싶은 유부녀'가 아닌 '집착하는 아줌마'가 되었다는 뼈아픈 열등감으로 마구 엉클어졌다.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다 취기가 오른 지영은 이제는 열등감이 아닌 배신감에 화가 치밀었다. 이 배신감을 준호에게 되갚아주고 싶다는 격렬한 충동에 잠식되어 갔다. 지영은 자신이 느낀 좌절감과 배신감을 그에게도 똑같이 안겨주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지영은 커뮤니티 센터의 고객의 소리란 온라인 게시판에 익명의 글을 올렸다.


"줌바 강사 A 씨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수업에 일찍 가서 복도에 혼자 대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다가 온 강사가 내 몸을 만지면서 부적절한 언행을 했습니다. 무서워서 신고는 못 했지만, 다른 회원들이 피해를 볼까 봐 용기를 내어 알립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영의 글은 게시판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자극적인 소문은 삽시간에 아파트 전체로 퍼져나갔고, 줌바 강사 준호는 곧바로 커뮤니티 센터 책임자에게 불려 갔다. 센터 측은 진위 여부를 떠나 '회원들의 불안감 해소'를 명분으로 들며 준호 강사에게 빠른 해고 통보를 내렸다.


며칠 후,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센터에서 짐을 싸서 나가는 준호를 지영은 멀리서 지켜보았다. 짐 가방을 든 그의 얼굴은 황망함과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영은 짧은 순간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멀어져 가는 남자의 축 쳐진 등을 바라보면서 곧바로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걸까?"


준호가 떠난 자리에는 나이 지긋하고 짧막한 여성 줌바 강사가 새로 왔다. 그녀의 춤은 영 힘이 없었고, 동작은 너무 평범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줌바 음악 대신 주부들이 따라 하기 쉽다며, 중간중간 80년대 트로트 음악을 틀었다.


열정 없는 강사의 수업은 점점 활력을 잃어갔다. 뜨거운 라틴 리듬이 없는 줌바는 지영의 심장을 더 이상 뛰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새로 온 강사는 춤이 끝날 때마다 쓸데없는 소리를 농담이랍시고 늘어놓으며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 멈춤의 시간 동안 지영은 다시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라는 굴레만 더 자주 떠올렸다. 살아 있다는 희열을 느끼기는커녕.


지영은 줌바 수업에서 점점 고립되어졌다. 언젠가부터 다른 회원들이 그녀를 향해 언짢은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익명 게시판이라더니 입주자 대표를 통해 익명의 게시판에 글을 쓴 게 지영이란 사실이 밝혀진 듯했다. 알음알음 소문을 접한 회원들은 지영의 뒤에서 대 놓고 수군거렸다.


"그러게 구관이 명관이라잖아, 어디서 그런 선생을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누가 아니래요. 공연히 들쑤셔가지고는......"


지영이 게시판에 올린 익명의 글은 부메랑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왔다. 이런 걸 자업자득이라지. 지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잃은 것은 준호가 아니라, 그에게서 받은 순수한 에너지와 삶의 기쁨이었다는 걸.


줌바를 그만둔 지영은 하루하루 인형처럼 감정이 말라갔다. 여전히 지영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놀아달라는 하율을 보면서도 그저 텅 빈 눈으로 내려다 볼뿐이다. 어제 같은 오늘과 오늘 같은 내일이 그저 빨리 지나가버리기만 바라면서. 밤늦게 집에 들어온 남편은 요즘 부쩍 말도 없고 힘없어 보이는 지영이 걱정되는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즘엔 줌바 안 해? 어디가 아픈 거야?"


남편의 물음엔 대답도 하지 않고, 지영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화장대에 앉았다. 거울 속에는 생기를 잃고 하루하루 늙어 가는 초라한 주부가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살아 있다는 희열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쫓아낸 것은 준호가 아니라, 유일한 일상의 탈출구였다. 지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뜨거웠던 라틴 리듬이 귓가에 희미하게 맴돌았다. 그렇게 지영은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며 어둠 속에 점점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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