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 로봇에게 위로 받다
만복은 돌봄 로봇의 완벽한 돌봄과 배려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로봇은 만복의 난청을 고려해 모든 대화 시 왼쪽 45도 각도에서 오른쪽 귀를 향해 정확히 12 데시벨 증폭된 소리로 말하는 꼼꼼함을 보였다.
"어르신이 즐겨 들으시던 음악을 틀어드리겠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10월의 노래'입니다."
'봄'이 틀은 음악은 여전히 처연하고 쓸쓸했다.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한 계절과는 잘 어울렸지만 만복의 마음은 불편했다. 만복은 정말로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먼지를 폴폴 날리며 뛰어다니기도 바쁜 마당에 클래식처럼 고상한 음악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이야 온갖 오디오 시설과 엠프까지 빵빵하게 갖춰 놓고 있지만 그건 젊은 시절 결핍을 채우기 위한 과시적인 행동일 뿐이다. 만복은 처음부터 이 노래가 싫다고 말했어야 했다. 문화적으로 문외한인 삶을 산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돌봄 로봇 앞에서라도 고상해 보이고 싶은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트로트 노래나 베트남 파병 시절에 들었던 군가들이 더 듣고 싶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애매한 웃음만 흘리면서.
"나는 스무 살 때, 월남에 있었어. 거기서 나랑 동갑인 녀석을 만났어. 그 녀석도 부모 없이 엄청 고생을 했더라고. 우린 한국에 돌아가면 같이 장사를 하기로 했어. 그런데 폭격이 하루 종일 쏟아져서 다들 벌벌 떨던 날, 녀석은 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어. 난 어떻게든 녀석을 살리고 싶었어. 하지만, 공포심에 한 발짝도 뗄 수가 없더군. 피를 철철 흘리면서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두 번째 쏟아진 폭격에 산산이 부서졌어. 형체를 알아보지도 못하게 말이야. 난 늘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같아. 녀석을 위해서도 그랬고, 내 딸을 위해서도 말이야. 정말 아무것도 하질 못했어."
'봄'은 만복의 손을 자신의 차가운 손으로 감쌌다. 인간처럼 따뜻한 체온을 지니진 않았지만, 그 행동은 나름 완벽한 공감의 표시였음을 만복은 느낄 수 있었다.
"주인님은 살아오는 내내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주인님의 희생은 숭고합니다. 주인님이 아니었으면 안방에 계신 여주인님은 누가 돌봐 드리겠습니까? 아드님의 필요한 자금도 어떻게 충당했겠습니까? 주인님이 자책하실 일은 전혀 없으십니다. 그저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입니다."
만복은 확실히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돌봄 로봇은 돈만 바라지도 않았고, 그의 상처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처음엔 돌아올 거란 생각에 딸을 찾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곤 사는 게 바빠서란 이유로 안 찾았다. 그러다 세월이 점점 쌓여가면서는 딸의 원망이 두려워서 못 찾게 되었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문밖 벨 소리와 함께 아들이 들이닥쳤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아버지는 저 보다 저 쇠붙이가 더 좋습니까? 저 것만 끼고돌고 모처럼만에 온 아들은 반기지도 않으시고 말입니다."
"너야, 뭐 돈이 필요할 때만 찾아오니...... 뭐, 왜 또 돈이라도 필요하냐?"
"그게... 제가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데 돈이 좀 부족해서요. 애들은 한창 학비가 많이 들어갈 때고, 와이프는 애들을 유학 보내고 싶어 해서 저도 정말 죽겠습니다."
치솟아 오르는 화를 애써 참으며 만복이 물었다.
"그래, 얼마나 필요한데?"
"한 일억만 당겨 주세요. 어머니는 요양원에 보내시고 아버지도 이제 혼자살 거니 이 집 팔고, 좀 작은 집으로 옮기시면 충분히 융통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집이 커 봤자, 청소하기만 힘들죠."
그러면 그렇지 역시 아들은 돈이 필요했던 거였다. 만복은 노기가 올라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가까스로 목소리 톤을 낮춰 물었다.
"청소는 봄이가 하면 되니까 네가 신경 쓸 건 없고, 암튼 돈은 생각해 보마."
당장 긍정적인 대답을 안 해주고, 시간을 두고 생각한다는 말에 아들은 화가 치밀어 공연히 돌봄 로봇을 째려봤다.
"저런 쇠붙이라도 있어 다행이네요. 하긴 저걸 믿고 아버진 어머닐 요양원에도 안보내시는 거지만. 그럼 잘 생각해 보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들이 사라져 버린 휑한 현관을 바라보면서, 만복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만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로봇이 물 한 컵을 쟁반에 든 채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현재 심박수가 15% 상승했습니다.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심장에 매우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좋은 영상이라도 틀어드리겠습니다."
커다란 TV 화면에서 이리저리 유튜브 채널을 돌리던 로봇은 어느 중년 여성이 나오는 채널에서 멈췄다. 그녀의 얼굴이 로봇의 머릿속에 빠르게 입력되었다. '어디서 본 여자였지?' 로봇의 데이터가 마구마구 머릿속에서 지나가다 하나의 사진에 멈췄다. 치매를 앓는 여주인이 자주 들여다보던 사진 속 여자가 틀림없었다. 여주인은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서럽게 울었었다.
"주인님, 저 여성은 제 데이터 상에서 주인님 따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안방에서 봤던 사진 속 여인에게서 삼십오 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바로 저 여성의 얼굴이 됩니다. 분명 주인님 따님이 틀림없습니다."
만복은 고개를 들어 화면 속 여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딸이라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영상 속 여자는 사회 복지사였다. 독고 노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필요한 것을 살피고, 불편한 것이 없나 챙겨주고 있었다. 워낙 성실히 근무한 까닭으로 얼마 전 시에서 표창장도 받았다고 한다. 아무리 고집이 센 노인들도 저 여자가 찾아가면 고분고분해진다며 '사회를 밝히는 100명의 사람' 특집 편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참을 눈만 끔뻑거리면서 쳐다보는 만복을 보면서 로봇은 안방으로 가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나왔다. 아내는 잠이 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사진을 그 앞에 내밀었다.
"주인님, 이 사진을 보세요. 여기에 주름을 입히고 살을 조금 찌우면 바로 저 여성이 됩니다."
만복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사진과 영상을 번갈아 보면서 소파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제가 데이터를 모아서 저 여인의 거주지와 연락처를 찾아보겠습니다."
로봇은 한참을 바쁘게 움직였다. 언급된 복지관 연락처나 유튜브에 표시된 동영상 제작자의 연락처로 분주하게 연락을 취했다. 그런 로봇을 바라보면서 만복은 이게 꿈은 아닌가 싶었다. 꿈에서도 그리던 딸을 이제야 만날 수 있는 건가 싶어, 그저 멍하니 영상만 처다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