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글자의 집합소가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감동도 가르쳐야 한다.
감동도 가르쳐야 한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냐고 웃어넘겼습니다. 감동은 그저 때 되면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처럼, 책을 읽다 보면 느끼는 너무나 당연한 감정이라 여겼기에 저런 말의 존재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최근 지인 아이들 몇 명과 독서 수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등 아이들인지라 중등 아이들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제 아이를 포함한 대다수의 초등학생들은 비슷한 양상을 띱니다.
아이들은 유튜브라는 짧은 영상매체에 빠져들고, 학습만화라고 이름 붙은 책을 보고 또 봅니다. 웃을 거리를 유튜브에서 찾고, 지식을 학습만화로 외웁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아는 것을 늘려간다니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요? 어려운 용어를 척척 말하는 아이를 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넓고 텅 빈 공간을 어떻게든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에게서 듣는 말, 친구와 대화하며 나누는 말, 걸어가면서 보는 간판, 하다못해 나무 위의 새소리에서도 기억할 것을 찾고 배우고 있겠지요. 어른들에게 잔잔해 보이는 일상일지라도 아이들은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고, 호기심을 발휘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아이들의 에너지와 호기심이 지나치게 단편적인 지식을 쌓는데만 이용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그리하여 책 속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책의 등장인물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책의 이야기가 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난민 소년과 수상한 이웃( 베아트리스 오세스 글, 안소민 그림, 김정하 옮김, 꿈꾸는섬 펴냄) 은 스페인 작가 베아트리스 오세스가 쓴 책으로 현지에서 연극으로 무대에 올릴 만큼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책은 부모를 잃고 난민 수용소를 탈출한 소년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법정에서 소년을 나무에서 떨어진 '호두'라는 주장을 펼치는 내용입니다. '난민'이 아닌 마당의 호두나무에서 떨어진 '호두'로 인정받아야만 추방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책은 두 가지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우연한 기회로 인연을 맺게 된 마을 사람들과 아이의 이야기, 법정에서 마을 사람들이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마지막에 큰 반전을 던집니다. 재판장의 손녀가 '호두'에게 자신의 할아버지가 '아몬드'라는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아몬드'는 오래전 그 마을에 있었던 난민 소년을 지칭하던 말이었습니다. 즉, 재판장 또한 난민 소년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반전이었지요.
사실 이 놀라운 반전은 마지막 장의 마지막 한 줄의 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발레리아는 자기 할아버지가 아몬드였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 반전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냅니다. 마지막 장 까지 살뜰히 읽어보지도 않은 것이 티가 납니다.
“아몬드가 왜요? 호두의 다른 이름이 아몬드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설명을 시작합니다. 변호사의 할아버지가 했던 재판에서 '아몬드'라고 지칭되었던 난민 소년이 바로 지금 재판장이라고, 그걸 손녀가 이야기해줬다고요. 그제야 아이들은 말합니다.
“아~ 이거 엄청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네, 저는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감동을 가르쳤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을 가르친 건 아니니,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책의 맥락을 짚어준 것이지요.
꽝 없는 뽑기 기계(곽유진 글, 차상미 그림, 비룡소 펴냄)는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집에 조부모님이 번갈아 오시고 언니가 엄마, 아빠의 칫솔이 없다며 슬프게 우는 장면까지만 읽어도 '부모님이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은데 오히려 "왜요? 언제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안 나왔는데요?" 하고 되묻습니다. 알록달록한 뽑기 기계가 아이들의 혜안을 가렸을까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라고 쓰여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일까요?
책이 글자의 집합소가 된 듯합니다. 그저 글자를 읽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감동적인 장면에서도 감동은 마음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저 멀리 지나쳐가 버립니다.
아이들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보라고 합니다.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가 줄더니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버립니다. 내용만 빠르게 읽어내는 만화책에 익숙해진 탓입니다. 글자 하나만 바뀌어도 책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그 정도 맺음말은 이미 다 예상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속담 중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어찌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글자 하나하나의 힘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작가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풀어서 말하냐에 따라서 책은 천차만별이니까요.
외국의 책을 번역하여 한글로 출판할 때, 책에는 '옮김'이라는 글이 붙습니다. 영어를 한글로만 번역해서 썼다는 뜻입니다. 어린이들에게 맞게 줄거리를 축약하거나 내용을 쉽게 쓴다면 그 책에는 '엮음'이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옮김'이라고 쓰인 책이라고 다 같을 리가 없습니다. 번역자에 따라서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어떤 표현을 쓰는지에 따라서 글은 달라지니까요.
두 권의 오즈의 마법사가 번역본이 있습니다.
오즈의 마법사 (L. 프랭크 바움 글, W.W. 덴슬로 그림, 김석희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의 북쪽 마녀는 도로시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걸어서 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때로는 즐거운 곳을 지나고, 때로는 어둡고 무서운 곳을 지나서 먼 길을 가야 한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을 다 써서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즈의 마법사 (L. 프랭크 바움 글, W.W. 덴슬로 그림, 손인혜 옮김, 더스토리 펴냄)의 북쪽 마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걸어가면 돼. 아주 긴 여행이 될 거야. 이 나라를 지나가다 보면 때로는 즐겁겠지만 어떤 때는 무섭고 끔찍한 일도 생길 거야. 하지만 내가 아는 모든 마법을 동원해서 너를 지켜 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
두 마녀는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와닿는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첫 번째 마녀는 상냥하고 믿음이 가는 마녀입니다. 도로시를 안심시키려 하는 것이 느껴지지요. 두 번째 마녀는 단호하지만 또한 노력한다니 믿음이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도로시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요. 책은 만화책만 봐요.
많은 학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책을 읽을 시간을 만들어주세요. 학교 갔다 학원 갔다 숙제까지 다하고 놀 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주면 저라도 읽기 싫을 겁니다. 아이가 심심할 시간을 만들어주세요.
책을 읽어주세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라고 해서 혼자 책을 읽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부모가 읽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읽어주는 책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스스로 독서로 빠져들 가능성이 커집니다.
아이가 재미있어하는 책을 찾아주세요. 역사 동화, 판타지 동화, 생활 동화, 과학 동화 등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를 알면 고구마 줄기처럼 확장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디밀어보고 아니면 다음, 다음을 외쳐야 합니다.
책을 바로 읽고, 이해하고, 상상하고, 그 울림을 느껴 '감동'이라고 표현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길 바래봅니다.
아이들이 만드는 감동적인 세상을 꿈꾸며.
저절로 책을 좋아하게 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누군가는 아이를 매혹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여야 한다. 누군가는 아이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 Orville Prescott
main picture by Annie Spratt i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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