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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Jul 27. 2022

영어학원 테스트에서 외국에 살다 왔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모는 주인공을 믿어주는 관객이다.

자유로운 영혼.

사춘기 호르몬의 영향으로 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게 되었다고 위안하는 수많은 학부모 중의 한 명입니다.

주변에 넘실대는 경험담을 종합해보면 아이들의 사춘기는 대략 세 가지 양상으로 나뉘는 듯합니다.

문을 쾅 닫고 들어가거나, 무기력해지거나, 별다르지 않거나.

아이가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음악에 빠져 살며, 친구가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문을 쾅 닫고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안 먹어도 배 고파 하지 않고, 먹는 것에 관심이 없어지며, 잠만 늘어지게 잔다면 무기력일 테고요.


저희 아이는 중1이 되더니 잠이 어마어마하게 늘었습니다.

처음에는 중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1학기 내내 아이는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침대에서 자기도 했고, 잠옷까지 싹 갈아입고 소파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자는 시간은 점점 늘어서 1시간이던 것이 어느새 4시간까지 늘었습니다. 낮잠을 자니 밤에 잠이 올리가 없고 새벽까지 깨어서 놀다가 잠이 들면 학교 갈 시간에 깨우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것이 하도 목이 아프고, 제 아침 기분까지 상하는 것 같아 아무 말 없이 냄비 두 개로 꽹과리 소리를 낸 적도 있습니다. 그날 벌떡 일어난 아이는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더라고요.


네, 제 아이의 사춘기 양상은 무기력입니다.

아이가 두 달 전 짜서 낸 계획표는 이미 엉망이 된 데다 생활 습관까지 망가져 하루에 반나절만 깨어있는 날도  생겼습니다.

지금 아이는 토요일에 기타를 배우는 실용음악학원을 빼고는 어떤 학원도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평일에 영어, 수학 학원을 다녀와서 숙제를 하고 나면 놀 시간이 없다는 다른 아이들과 매우 다른 생활을 하고 있지요. 사춘기에는 학원을 정신없이 돌려야 딴생각을 못한다는 말도, 중1에는 시험을 안치니 학원에서 시험을 쳐야 한다는 말도 귓등으로 흘렸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잠과 살이 느는 만큼 아이에 대한 저의 믿음은 조금씩 의심으로 바뀌어갑니다.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친구를 만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아이가 학원도 다니지 않으려고 하면서 낮잠만 퍼질러 잔다고요. 너희 아들은 알아서 학원을 다니니 얼마나 좋으냐고 부럽다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묻습니다.

"그냥 네가 등록하고 다니라고 하면 안 돼?"

“아, 그럴 수는 없지. 본인이 다닐 마음이 있어야 보내지.”

친구가 말합니다.

“나는 맞벌이라 어릴 때부터 학원을 보냈어. 얘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스케줄 짜서 보냈다고. 넌 왜 학원을 안 보냈어?”

“아.. 그게.. 학원비가 아까워서.. 어릴 때 그 정도는 내가 가르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아이들 여유시간도 더 생기니까.”

“그것 봐. 네가 애를 자유롭게 키워 놓고 왜 이제 와서 자유롭다고 불평을 해? 네가 그렇게 키웠잖아”


아 이런 현명한 친구를 봤나.

비닐에 싸인 애호박이 생각났습니다. 애호박이  작을 때 비닐을 씌워주면 자라면서 비닐에 꼭 맞게 큰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닐을 씌우지 않으면 제멋대로 크지요. 실제로 부모님이 가끔 밭에서 가져오는 애호박은 마트에서 제가 보던 애호박과는 무척 모양이 다릅니다. 울퉁불퉁하고 한쪽이 툭 튀어나오거나 진짜 호박처럼 둥글기도 합니다.

아이가 애호박이라면 저는 아이가 어릴 때 비닐을 씌워 준 적이 없습니다. 자유롭게 자라길 바랬고 실로 자유로운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매일 맞춰야 할 학원 버스 시간이 없어서 좋았고 방문 학습지 선생님이 안 오시니 집을 치운다고 수선을 떨지 않아도 되어 좋았습니다. 책을 읽다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게임하다 끌어안고 깔깔거리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자유롭게 키워서 자유롭게 자라온 아이들인데, 주변에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공부에 하루를 온전히 쓰는 아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넌 왜 그러지 않냐고 책망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누구를 향한 책망일까요. 애호박의 반은 비닐에, 반은 밖에 나와 있는 요상하기 짝이 없는 모양을 바라는 걸까요? 껍질이 깎이던 말던 비닐 밖에 나와있는 애호박을 억지로 비닐 속으로 집어넣으면 과연 썩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요?


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공부를 하고 하지 않고에 따라 너의 가치가 평가되지는 않아. 그건 확실해. 하지만 공부를 아예 안 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하는 건 큰 차이야. 그건 네가 너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태도의 문제야.

너의 일상과 너의 일상에서 느낀 새로운 감정과 친구와의 소통, 영감. 그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내가 생각하는 기본, 학생으로서의 해야 할 가장 최소한의 공부조차 되지 않는 것이 화가 나는 거야. 나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조금이라도 채워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삶을 살아가는데 성실함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되니까.
-중략-
아침에 방방 뛰어다니며 잔뜩 웃었다지만 사실 너의 아침은 없었어. 사라졌어. 너의 하루는 반토막이 되었고 너의 몸은 병들고 있어. 하루에 반나절밖에 누릴 수 없는 몸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하루를 온전히 보낼 수 있게 되길 바래.

그 하루에 네가 느낄 감정과 영감은 배가 될 거야. 자랑스러운 마음도 흡족한 마음도 곱절로 느낄 수 있을 거야.


다음 날, 아이는 영어 학원에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수학 학원은 정말 가기 싫으니 영어 학원을 가보겠다고요. 영어학원 테스트를 보러 갔습니다. 상담 실장님이 1번부터 8번까지 영어 문장이 쓰인 한 바닥의 종이를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한글로 해석을 해보라고요. 그리고 8개의 문장 중에 확실하게 해석했다고 생각하는 문장을 체크해보라고 합니다.

아이는 7,8번 문장은 못하겠다고 했고 확실한 해석은 2번을 제외한 5개라고 했습니다. 상담실장이 아이에게 묻습니다.

"이 사람이 열쇠 꾸러미를 잃어버렸다고 썼는데 혹시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를 발견한 건 아니니?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합니다.

 "제 해석이 맞는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해?"

아이의 고개가 더 크게 기울어집니다. 고민이 길어지자 다시 묻습니다.

"혹시 수동태라고 들어봤니?"

"아니오."

"접속사는? 투 부정사는?"

질문마다 아이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혹시 아이가 어릴 때 외국에 살다 오셨나요?"

깜짝 놀란 제가 손사래를 치며 말합니다

 "아니오. "

"제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아이의 해석이 너무 완벽해서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 문법은 하나도 모르는데 이런 결과가 나온 아이들이 보통 어릴 때 외국에서 살다온 아이들입니다. 혹시 영어를 왜 배운다고 생각하니?"

아이가 말합니다.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우리가 이제 중학교, 고등학교 , 수능 시험을 봐야 하잖아.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문법을 알아야 해."

"어머님, 아이가 영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지만 문법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상위 반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반에 들어가야 합니다. "

"아이가 아는 친구들과 같은 반은 안 되나요?"

"그 친구들은 학원을 오래 다닌 아이들이라 아이가 들어간다고 해도 너무 어려울 겁니다. 처음부터 배우는 것이 나을 겁니다. "


지금까지 아이의 영어는 원서 읽기로 시작하여 영상을 거쳐 외국 배우와 가수의 덕질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이스쿨 뮤지컬’이라는 미드에서 올리비아 로드리고와 조슈아 바셋에 빠져 노래를 통째로 외우고 가십을 검색하는 것이 일상이고, 매일 20분씩, 화상영어 선생님과 한류에 대한 수다를 떨고 연예계 정보를 교환합니다. 영어 학원 원장인 친구가 “중학교는 3700 제지”라는 말에 덜컥 문제집을 사서 디밀었다가 3700원 치도 안 풀고 구석에 박혔고 단어를 외우게 한 적 없으니  당연히 문법도 접한 적이 없습니다. ‘읽으면 영어 천재가 되는 만화책’이 너무 재밌어서 읽어보라고 했는데 자느라 바빠서 아직 읽지 않은 상태입니다.


학원을 나와서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의 이유가 더 맞다고 생각해. 하지만 문법도 배우긴 해야지. 저건 좀 재밌지 않아?”

아이가 말합니다.

"어려울 것 같은데 배우긴 해야 할 것 같아."


사춘기에 접어든 무기력 쟁이,

맘에 안 들고 말도 안 통하고 동생에게는 시베리아 찬바람이 쌩쌩부는 아이.

하지만 믿어야 합니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니까요.

엄마로서 불안하지만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갈 아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어 봅니다


얼마 전 읽은 육아서 ‘부모는 관객이다’에서 작가님의 아이가 지나가다 육아서를 보고 있는 작가님에게 “왜 그런 책을 봐? 난 이렇게 해서 자녀 교육에 성공했다, 그런 자랑하는 거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조금 뜨끔했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것 맞거든요. 자랑이 가끔은 제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는 격려가 되어주니까요.


난 오늘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했고, 미뤄두었던 방 청소를 했고, 방학 숙제로 ‘어린 왕자’ 필사를 했고, 책을 읽다가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반짝이던 감정이 신기해 얼른 글로 옮겨 써보기도 했다. 시도해보지 않은 문체로 나 다운 글을 쓴 것이 자랑스러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었던 하루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하루라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는 유난히 햇빛이 밝았고 따뜻했다. 나는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며 그 기분을 간직하려 노력했다. 감정이 영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오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한 감정들을 많이 느꼈다. 하루가 꽉 찬 기분이었다.
-아이의 일기 중-





Main picture by MILAN GAZIEV i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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