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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Aug 31. 2022

딸아이가 롯데 자이언츠 야구팬이 되면 생기는 일 2.

청소년들의 승부욕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부산 사직구장의 여운이 채 식기도 전에 아이는 이대호 선수의 은퇴투어에 가고 싶다 했다. 야구 티켓을 예매하는 앱에서 응원 댓글을 쓰면 50명을 추첨하여 이대호 선수에게 사인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벤트가 한창 열리고 있을 때였다.

아이와 나는 각각 이벤트에 댓글을 남겼다. 나는 부산 사직 구장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댓글로 남겼다. 하지만 댓글은 이미 천 개가 넘어가고 있었고, 당첨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저녁 열 시에 문자가 왔다. 당첨 문자가!!!


이대호 선수 은퇴투어 팬 사인회 댓글 이벤트 당첨

우리 가족은 이 이벤트 당첨이 순전히 나의 운이라며 천 명이 넘는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 볼리가 없다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나는 롯데 자이언츠의 관계자가 내가 쓴 댓글을 읽었을 거라 믿고 있다. :)


그렇게 우리는 지난 28일, 인천 문학 경기장에서 열리는 이대호 선수 은퇴투어에 가게 되었다. 일주일 만에 또 야구 경기를 보러 가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인천에 사는 대학 동창에게 전화를 했다. 본 지 오래되었으니 함께 야구 관람을 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티켓은 자기가 끊겠다고 했단다. 오랜 SK팬인 동창은 롯데 자이언츠 팬인 우리를 생각해 홈 쪽 외야석에 티켓을 끊었다. 주변으로 자리도 많이 비어있고 외야라 롯데든 SK이든 응원해도 괜찮을 거라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에 대해 반가움에 너무 큰 것을 간과한 실수였다. 우리 가족에는 롯데 자이언츠 팬인 중1 딸이, 동창의 가족에는 SSG의 팬인 초6 아들이 있었다. 무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기 아이 2명이 말이다!


시작은 너무 좋았다. 동창의 가족은 고맙게도 경기 시작 시간보다 1시간 반 전에 시작하는 이대호 선수의 사인회 시간에 맞추어 와 주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의 훌쩍 큰 아이들을 보며 회포를 풀었다. 초6인 동창네 아이는 스스럼없이 초3인 아들과 이야기하며 놀아주었고, 7살 동창네 딸은 세상 귀여움을 뽐내며 폴짝거렸다.

딸아이는 이미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은퇴투어’라고 쓰인 사인지를 받아 어제 정성 들여 쓴 팬레터를 함께 들고 사인회 줄을 기다리고 있었다. 행복한 날, 온전히 행복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이대호 선수가 사람들의 환호를 뚫고 등장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선물용 모자에 빠르게 사인하기 시작한 이대호 선수를 보며, 빙글 둘러 선 사람들은 제각각 ‘부럽다’, ‘나도 받고 싶다’라는 말을 흘렸다. 나는 괜스레 으쓱해졌다가 초보 팬이 과한 행운을 안은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은퇴투어’ 사인회에서 받은 사인.


사인받은 모자를 들고 기분 좋게 구장에 입장한 우리는 깔끔하고 좋은 시설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경기장 내에 스타벅스가 있고 노브랜드 버거, 이마트 편의점도 있었다. 게다가 고기를 구워 먹으며 관람할 수 있다는 바비큐 존에 반려 동물과 함께 올 수 있는 잔디석까지! 지금까지 가 본 야구장 중에 최고였다.


우리는 미리 예매한 외야석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괴 동창은 먹을 맥주와 안주를 사다 나르더니 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건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스탭이 내야에 물을 뿌리고 하얀 선을 그었다. 기다란 막대기를 뒤에 단 카트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흙을 골랐다. 이대호 선수와 추신수 선수가 나와 포옹을 했고, 경기장 화면에 SSG선수들이 이대호 선수에게 보내는 응원 영상이 나왔다. 마지막에 인터뷰가 끝난 이대호 선수와 기념 촬영을 위해 양 팀 선수들이 더그아웃에서 걸어 나오는데 그 장면이 왜 그리 멋진지! 그라운드에서는 승부를 놓고 싸우지만 승부가 시작되기 전, 후의 그들은 그저 같은 야구를 하는 동료애 넘치는 이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서 양팀 선수들이 이대호 선수 은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SSG의 김광현 투수가 선발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SSG의 응원석은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우리 좌석 주변의 텅 비어있던 좌석도 마찬가지였다. 편하게 봐도 된다는 동창네의 말에 먹을거리와 가방을 올려놓았던 의자는 당연히 비어줘야 했고, 사방에서 SSG의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딸아이와 나는 롯데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왠지 모를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그만 조용해져 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굳은 얼굴로 조용히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고, 주변의 환호소리에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나와 남편은 SSG를 응원하는 동창네 7살 딸아이의 응원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한참을 웃다가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서는 쓴웃음을 삼켰다.

나는 할 수 없이 동창네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딸아이와 롯데 외야로 넘어갔다. 아이는 그제야 웃으면서 경기 내내 일어나 응원을 했다. 다음에는 자기 혼자 응원석 앞에 자리를 끊어달라는 말과 함께.


6회에 SSG의 수비 도중 김광현 투수가 넘어졌다. 겨우 일어나 절뚝이며 걸어가던 김광현 선수는 그대로 더그아웃으로 내려갔고 투수가 교체되었다. 야구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지만 잘하는 투수가 부상으로 교체되어 내려간 건 SSG에게 악재임이 분명해 보였다. 승부에서 상대편의 악재는 우리 편의 호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역풍의 바람을 타고 7회 초 이대호 선수가 2점 역전 홈런을 날렸다.

세상에! 오늘 롯데가 승리한다!


신나게 응원가를 부르고 있는데 남편과 동창네가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함께 보려 했는데 그들만 자신의 응원팀에 있는 것이 미안했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끝에는 초6인 아이가 화난 얼굴로 앉아있었다.

“왜 왔어?”

하고 묻자, 동창네 가족은 “괜찮아” 하고 답했지만

아이는 “억지로 끌려 왔어요!” 라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신나게 응원하는 딸아이 옆에서 나는 안절부절못해졌다. 응원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초6 아이가 화장실을 가겠다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 길로 아이는 SSG 응원석으로 혼자 돌아갔다. 걱정이 된 동창네는 아이를 쫓아 돌아갔다.


경기는 롯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유후~ 유후~

딸아이는 신이 나서 응원가를 중얼거리며 나왔고 초3인 아들은 형과 더 놀 수 없냐고 물었다.

경기장 게이트에서 만난 초6 아이는, 화가 잔뜩 나서 말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야구 유니폼도 거세게 벗어버렸다.

“야아~ 우리 어쩌다 이긴 거야. 너넨 맨날 이기잖아.”내가 아이를 달래 보려 했지만 역효과였다. 아이는 저만치 걸어가버렸고 우리는 급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아이들이 크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안다. 부모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간다. 가족 내에서 아이들의 그런 변화는 큰 자리를 차지한다. 가족이 함께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모두 즐거워야 하니까.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야구장에서는 만나지 말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신나게 오늘의 경기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승리 요정’ 아니냐며. :)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선수 은퇴투어 - SSG 랜더스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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