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언어적 표현 배우기
화음이는 물을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인 물, 잔잔한 물을 좋아한다. 물을 좋아하는 것은 엔젤만 신드롬을 가진 아이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집중력이 짧은 화음이가 물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을 볼 때면 아이의 눈에 비친 ‘물‘의 매력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화음이는 최근에 컵에서 컵으로 물을 옮기는 것에 매료되었다. 완전히 펴지지 않는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 때문에 화음이의 손은 항상 삶은 고사리처럼 움츠러들어 있다. 그 손으로는 가위질도 어렵고 숟가락을 바르게 쥐기도 힘들다. 그런 손으로 벌벌 떨면서 컵을 들어 올리고 살짝 기울여 담긴 물을 또르르 따라내는 것이다. 컵에서 컵으로 옮겨지는 물의 대부분을 바닥에 흘려버리지만 그 반복된 행위가 아이에게는 꽤나 성취감을 주는 모양이다. 나는 그깟 뒤처리가 뭐 그리 힘들다고 번번이 아이의 뒤에서 ’이쯤 했으면 이제 그만하라 ‘는 압박의 눈빛을 아이의 뒤통수에 연신 내리꽂는다. 엄마의 조급함을 눈치채면 아이는 더 보란 듯이 물을 엎지르곤 했다. 아무래도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어쩌면 아이는 자신의 작은 성취와 놀이를 엄마가 기꺼이 지원해 주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아주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그 ‘놀이‘에 기함하며 아이를 나무랐다. 아이는 ‘적당히‘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 그 적당히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잠시 아이의 입장이 되어 보자.
손잡이가 달린 머그컵은 아이의 손에 제법 무게가 나가는 것이어서 이 컵을 들기까지도 꽤 오랜 연습과 수고가 따랐다. 그동안은 던져도 깨지지 않는 가벼운 플라스틱 컵을 사용했다. 그게 아니면 뚜껑에 빨대가 달린 스테인리스 물병을 사용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식사 때 언니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머그컵이 놓였다. 아이는 스스로 많이 자란 것만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컵에는 여전히 조금의 물만 담겼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언젠가는 언니처럼 꽉 찬 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매일 조금씩 손가락 근육을 키웠고 이제 제법 컵을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노련해졌다. 마침 식사를 끝낸 언니의 빈 머그컵이 앞에 놓여있다. 아이는 지금껏 연마한 컵 기울이기 실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자신의 컵에 조금 남아 있던 물을 언니의 컵으로 옮겨본다. 성공이다! 와, 이거 정말 놀라운 걸!! 엄마! 이것 보세요! 내가 해냈어요!
엄마의 감탄에 아이는 자아가 기를 펴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조금 흘렸지만 다음에는 하나도 흘리지 않고 다 따라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여러 번, 반복적인 훈련에 돌입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가 행주를 손에 들고 매번 아이의 연습을 방해한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완벽한 기술을 갖출 수 있을 텐데. 엄마는 도대체가 ‘적당히‘를 모른다. 왜 저러는 거야 정말!
언어가 없는 아이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에만 의지하는 내 공감 능력의 한계와 매일 마주쳐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아, 나는 언제쯤에나 너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발달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은 언어 치료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아이가 생후 6개월 때부터 온갖 치료들을 거쳐왔던 나의 경험으로도 언어 치료는 단연 우선순위 상위권을 차지한다. 양육의 목적이 ’ 자녀의 독립’이라고 한다면 의사소통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생존 수단이 될 것이다. 언어 치료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성 언어를 떠올리지만, 언어 치료의 영역은 비단 ’ 말하기‘에만 집중되지는 않는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의사소통 수단들이 언어 치료의 영역에 속한다. 화음이의 경우, 음성 언어로 구사할 수 있는 단어는 ’ 엄마, 아빠‘ 고작 두 개다. 그마저도 일부러 말하도록 시키지 않으면 도태되어 사라질 위험이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가 질릴 정도로 자주 아이에게 말을 건다.
“화음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양육하는 부모가 해서는 안 되는 질문 중 하나인 이 질문을 나는 매일 아이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한다. 대답은 항상 같다.
“아 빠 ”
아빠라는 단어를 잊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하루 종일 자기 뒤치다꺼리에 헐떡이는 이 엄마의 노고를 외면하는 딸아이에 대한 괘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대답이다. 아이의 입 근육들이 아빠,라는 단어의 감각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화음이는 AAC(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라는 언어지원 디바이스를 사용한다. 단순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고 여러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다. 아이는 3살 이후로 줄곧 이 디바이스를 사용했고 제법 익숙하게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학교와 집, 교회에서도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화음이의 언어 치료의 목표는 디바이스 사용 빈도를 늘리고 구사할 수 있는 표현들을 늘려가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아이가 디바이스를 끼고 엄지 손가락으로 몇 번 꾹꾹 누르더니 문장을 만들어냈다.
“I want hug.”
그날의 감격이란 백 마디의 사랑 고백보다 더 황홀하고 달콤한 것이었다. 언어가 없는 아이의 표현은 가문 여름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비만큼이나 가치 있고 간절한 것이다.
비록 그 문장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지만 내 기억 속에 소망으로 각인되었다. 나는 아이를 있는 힘껏 꼬옥 안아 주었다. 화음아, 이게 바로 허그야. 이게 바로 사랑이야.
나는 아이가 보여주는 수많은 비언어적 표현들을 잡아내기 위해 오늘도 아이를 관찰한다. 여전히 나는 삐그덕 거리면서 아이의 세계와 번번이 충돌하지만 인내하며 너의 속도에 적응해 가리라.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물 따라내기 묘기에 열렬히 박수 쳐 주는 엄마가 되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