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에 새겨진 정체성

코스트코에서 만난

by 채플힐달봉

장 보러 가는 일은 정말 귀찮은 업무 중 하나다. 전날 저녁에 장 봐야 할 목록을 작성하면서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오빠, 나는 정말 살림 중 그 어떤 종목에도 흥미가 없어. 특히 장 보는 것 말이야.”

투덜투덜. 내가 그렇게 투덜거릴 때면 남편은 딱 한 마디를 한다.

“나랑 바꿀래?”

그러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편 입장보다는 내가 나은 것 같다.


나는 달에 한 번 정도는 집에서 30분 떨어진 코스트코로 장을 보러 간다. 코스트코에서만 살 수 있는 물품들이 있기 때문에 건너뛸 수 없다.

나머지 것들은 집 근처의 마트 세 군데를 돌아가며 이용한다. 쌀이 떨어지거나 한국과자가 생각날 때면 집에서 40분 떨어진 H마트를, 거진 세 달에 한번 꼴로 간다.

장보기 업무는 주기적이고 반복적일 뿐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가 상당히 드는 일이다.


2년 전, 친구 중 하나가 어느 단체를 후원하려고 구입한 장바구니를 주변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내가 원래 쓰던 장바구니가 드디어 찢어져 2년이 지나서야 친구가 선물로 준 그때의 장바구니를 펼쳤다.

앞뒤로 로마서 말씀이 빼곡히 적힌 장바구니였다. 재질이 빳빳하고 방수가 되는 녀석은 나의 최애 장바구니로 등극했다.

나는 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접혀있던 장바구니를 털어 어깨에 걸면서 중얼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 나의 정체성은 크리스천이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장바구니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하고 자신의 정체를 큰 글자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메고 장을 보는 나 역시 그것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영수증 확인을 위해 긴 줄 끝에 장바구니를 어깨에 맨 채로 서 있는데 내 뒤로 흑인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거셨다.


너의 장바구니에 지금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아, 이건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너가 그것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고 있느냐는 거야. 외울 수 있어?”

“앗, 죄송해요. 저는 한국인이고 영어로는 아직 외우지 못했어요. “


그녀는 조금 아쉬운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큰 소리로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외우기 시작했다.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Romans‬ ‭8‬:‭28‬ ‭NIV‬‬


그녀는 나와 함께 그 말씀을 소리쳐 선포하고 싶으셨던 거다.

“나는 너가 한국어로도 영어로도 모두 이 말씀을 외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연륜과 영성이 느껴지는 그녀의 당부에 그러겠다, 꼭 그러겠다 약속을 했다. 피부색이 다른 우리가 강한 동질감과 형제됨으로 묶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호탕한 웃음과 사랑스러운 시선 속에서 장보기 업무가 주었던 지루함의 피로를 씻었다.

“ Have a blessed day!”

우리는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복된 하루를 빌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말씀 선포의 기회를 놓쳐버린, 준비되지 않은 나를 쥐어박으며 후회했다.

이 장바구니를 메고 다니려면 적어도 이 구절은 영어로도 술술 외울 수 있어야겠구나, 생각했다.

드러내지 않고 가급적 조용히 혼자만의 신앙을 비밀처럼 간직해 왔는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장바구니는 알고 있었다.

이 장바구니를 디자인했던 그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런 순간들을 꿈꿨을 것이다. 장바구니가 드러내는 분명한 정체성을 그 누군가가 알아보기를 말이다.

당신의 의도대로 오늘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말해 주고 싶다.


영어 말씀 암송에 도전한다.

언제고, 누군가 오늘처럼 말을 걸어왔을 때 함께 서 있는 그 자리가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의 현장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장바구니, 니가 나 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