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지난번에 선물용으로 사두었던 아보카도 오일, 어디 있지?”
남편이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아보카도 오일의 행방을 물었다. 그 오일은 이미 ‘선물’의 주인을 찾아 집을 떠난 지 여러 날 지난 뒤였다. 무엇 때문에 그 오일을 찾느냐 물었더니, 자신이 진행하는 북클럽 모임의 멤버 중 한 명이 저녁 초대를 했단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멤버의 아내 분이 초대를 한 것이다. 처음 가는 집에, 저녁까지 대접받는 자리인데 빈 손으로 터덜터덜 들어갈 수는 없단다. 나는 남편에게 그 정도의 기본 ‘에티켓’이 생겼다는 것이 매우 반가웠다. 우리 부부는, 초대받은 자리에 빈 손으로 가는 문제를 두고 종종 의견 마찰이 있었다. 남편은 주로,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빈 손으로 가도 된다, 고 했고 나는 약속시간에 조금 늦더라도 가는 길에 반드시 마트에 들러 과일이든 음료든, 하다못해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한다고 했다. 부부동반 모임이라면, 내가 미리 준비할 수 있으니 대체로 빈 손으로 가는 무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처럼 남편만의 모임 일 때에는, 내가 그 모임의 존재를 사전에 통보받지 못할 때도 많았다. 모임 당일이 되어서야 ‘나 오늘 그 집에 초대받았어.’할 때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그럴 때면 나는 부랴부랴 팬트리와 냉장고를 뒤져 사과 몇 알이라도 남편 손에 들려주었다. 그러면 남편은, 손사래를 치며 ‘빈 손으로 가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한사코 내가 들려준 과일 봉투를 내려놓고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덩그러니 버려진 종이봉투를 내려다보면서 친구 집에 초대받은 아이를 빈 손으로 보낸 무심한 엄마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랬던 남편이, 자기가 먼저 초대받은 집의 선물을 준비하다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럼, 내가 사과파이 구워줄 테니 가지고 갈래?”
마침,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싱싱한 사과 한아름이 있었다. 무려 필라델피아 어느 농장에서 갓 따온 사과라고 했다. 그냥 먹어도 아삭아삭 너무 맛있는 사과이지만, 우리 가족이 며칠 안에 다 소비하기에는 좀 많은 양이었다. 냉장고에서 껍질이 쭈글해진 채로 퍼석하게 변해가는 사과를 눈으로 보게 될 바에야 향기로운 파이를 구워내는 것이 여러모로 생산적일 것 같았다. 가을도 무르익었겠다 얼마 전부터 사과파이 노래를 부르던 큰 딸의 요청도 있었겠다, 마침 넉넉하게 준비된 사과도 있으니, 오랜만에 파이를 구워본다.
나는 베이킹을 좋아한다. 신혼 초에, 선물로 받은 미니오븐에 무엇이든 구워내고 싶어 서점에서 베이킹 관련 책을 몇 권 구입해 과정이 쉬워 보이는 것부터 하나하나 만들어냈던 기억이 있다. 베이킹을 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도구들을 갖추어야 했다. 주재료들도 평소 쓰지 않는 생소한 것들이 많았고, 외래어 가득한 재료들을 큰맘 먹고 집에 들인다 해도 생각만큼 자주 사용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지속적으로 또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섣불리 도구와 재료들을 갖출 수는 없었다. 실력과 열정이 검증될 때까지 비싼 도구들의 구입은 보류하기로 하고 일단, 대체 가능한 도구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쿠키류를 몇 번 성공시키고 자신감이 붙은 나는 무모하게도 케익에 도전했다. 도구가 없었으니 집에 있는 쉐이커 컵-미숫가루 타 먹을 때 가루 넣고 마구 흔들었던 플라스틱 컵-에 계란 흰자와 설탕을 넣고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흔들어 머랭을 만들어냈다. 베이킹 책에는 분명, 볼을 뒤집었을 때에도 머랭이 쏟아지지 않아야 했는데 나의 수동 쉐이커 컵에 담긴 머랭은 자꾸만 거품이 주저앉고 줄줄 흘러내렸다. 에라, 그냥 해 보지 뭐. 그렇게 만들어진 첫 번째 카스텔라는 케익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계란이 완전히 가라앉은 흡사 ‘떡’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우리 부부는 그 계란 떡에 초를 꽂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었다. 맛은 더 가관이었는데 우리는 그 계란 떡을 잘라 나눠먹으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남편은 종종 그날의 계란 떡이 그립다고 했다. 지금은 억지로 만들려고 해도 절대 그 계란 떡을 재연할 수가 없다. 무모함도 대범함도, 실패에 대한 관용도 어쩌면 그때의 우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나의 베이킹 역사는, 여러 실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꾸준함이 검증되면서 하나 둘 도구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구가 좋아지니 완성도도 높아졌다. 급기야, 미국에서는 베이킹 클래스를 열기도 했다. 맙소사, 그것은 쉐이커 컵으로 머랭을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무모한 도전이었다. 베이킹 클래스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옆집에 살던 언니 때문이었다. 그 언니는 한국에서 1년간 연구년을 지내러 온 내과 의사였는데 한국에서 살림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초보 주부였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어쨌든 밥은 해 먹고살아야 하니 이런저런 루트로 요리에 입문했고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베이킹을 배우러 30분 거리에 있는 베이킹 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자기도 몇 번 따라가게 되었다. 비싼 수강료를 내고 과자, 빵, 케익을 한 번씩 배워 오더니 대뜸 나에게 ‘베이킹 클래스를 열어보라’고 제안했다. 비싼 수강료도 아깝지만 30분 거리까지 가야 하는 수고를 더는 하고 싶지 않다했다. 나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클래스를 운영할 수 있다고 바람을 넣었다. 심지어, 클래스 두 어개를 열 수 있도록 사람을 모아 주겠다고도 했다. 언니의 야무진 말빨과 부추김에 나는 유야무야 끌려가게 되었고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니 언니의 말대로 클래스 두 어개를 운영하는 베이킹 강사가 되어 있었다. 그 시간을 돌아보면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무자격증 야매 강사가 베이킹의 기초를 설파한다는 것이 어찌나 가소로운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질 만큼 창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때 참 재미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내 수업의 주 고객은 한국에서 단기 연수를 온 비지팅 언니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한참 나이도 어린 내가, 장애가 있는 아기를 키우면서 베이킹 수업을 하겠다 하니 그저 돕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베이킹이 목적이었다기보다는, 베이킹을 핑계로 우리 집에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려 노력했다. 참 고마운 인연들이다. 나는 그렇게 6개월 남짓 베이킹 강사로 살았다.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던 언니들이 한국으로 하나 둘 돌아가면서 나의 베이킹 강사 시절도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렸지만, 그때의 경험은 이후 나에게 ‘도전’에 대한 용기로 기억되었다.
달콤한 사과파이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 나갔다. 남편이 낮잠을 자다 말고 부스스 주방으로 내려왔다. 식힘망에서 채 다 식지도 않은 사과파이를 조각내어 연하게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따라놓고 마주 보고 앉아 시식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서로의 모습을 보고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예쁜 사과파이를 구워서 예쁜 그릇에 담아 커피도 한 잔씩 따라 놓고, 경쾌한 피아노 재즈 음악도 틀어 놓았는데. 이 우아한 분위기에 오빠랑 나는 세수도 안 하고 머리는 떡진 채로 마주 보고 있다는 게 너무 아이러니 아니야?”
“아니지, 이게 바로 진정한 우아함이지. 이런 분위기에도 무심한 행색으로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진짜 여유 아니야?”
맞다. 이게 바로 여유지. 사과파이 두 개 중 내 눈에 조금 더 완성도가 높은 하나를 남편 손에 쥐어 보낼 선물용으로 포장하고 남편과 나눠먹고 남은 절반은, 딸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려고 식힘망에 올려 남은 열기를 빼어냈다. 파이를 구워내는 행위 하나 만으로도 삶이 한층 더 여유로워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사실, 베이킹만큼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도 드물다. 삶에서 얼마든지 덜어내도 그만인 부수적인 활동 중 하나가 바로 베이킹이다. 살만 찔 뿐이다. 그럼에도 베이킹이 내 삶에 꽤나 중요한 활동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나를 베이킹 강사로 세웠던 언니들의 깊은 배려처럼, 빡빡하고 우울한 나의 삶 가운데서도 일부의 숨 쉴 틈, 여유와 향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겨주는 매개가 하나쯤 있다는 위안, 그것이 내가 베이킹을 놓지 못하는 이유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