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서 출판한 <죄와 벌>은 1편과 2편 두 권으로 나뉘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겠다는 호기는 1편 중후반부를 읽을 때 하마터면 포기로 끝날 뻔했다. 조연들의 시시콜콜한 대화가 소설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 전개가 느리게 느껴져 지루했기 때문이다. 두꺼운 고전소설을 읽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러시아 이름이 생소해서 외우기 어려웠는데 별명까지 있어 오랜만에 등장한 인물이 나오면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해 다시 앞장을 펼쳐봐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2편을 손에 들고부터는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처럼 순식간에 반 이상을 읽어내렸다. 그토록 재미를 느낀 이유는, 죄를 저지른 라스콜니코프의 의도와 신념을 혹여 독자가 오해하거나 잘못 이해하기라도 할까 우려한 듯 정직하고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는 제목처럼 죄를 지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벌을 받게 된다는 뜻인데 과연 어떻게, 어떤 벌을 받게 될지 궁금해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게 된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똑똑하지만 오만한 인물로 비춰진다. 살인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고 믿는 그는 자신이 이蝨인지, 떨고 있는 피조물인지 알아내야만 하는 합리성과 필연성에 이끌려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뫼르소의 살인이 (햇볕이 뜨거워서라는) 은유적이고 다소 신비성을 갖는것에 비해 라스콜니코프의 살해 장면과 의도는 훨씬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책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라스콜니코프의 광기에 전이되어, 그가 짊어진 죄의 공범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렇듯 죄인이 있다면 성녀처럼 표현되는 인물들도 있다. 극빈 속에서(가난한 상황이 중요하다고 소설에서 여러번 언급된다) 다른 인간들을 위하여 고통을 짊어지는 소냐는 소설에서 중요한 존재감을 가진다. 소냐가 여섯 시에 나가 여덟 시에 돌아온 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그애 발치에 앉아 발에 입을 맞추는 장면은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이 순결은 죄와 상반되어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두냐를 쫓는 것처럼 죽을 때까지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죄와 벌>에서 중요한 부분은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며 죄를 짓고 싶은 본능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성녀의 사랑을 갈구하며 구원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단면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죽인 것은 노파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고통 속에서 깨닫는다. 마침내 소냐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에게서 인간성의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어 기뻤다. 그가 소냐에게 말했듯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파멸시킨다는 데서 순결과 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죄가 합리적이고 필연적임을 암시하면서도 죄인들이 결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순결이 죄보다 강한 것이라는 메세지로 다가온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자신을 쏘고, 라스콜니코프는 자백하며 소냐의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소설의 긴 내용에 비해 다소 급하게 결말 짓는 느낌도 있었다. 라스콜니코프의 교화를 납득하고 결말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카인의 후예는 아직까지 나에게 숙제인데, 이번 기회로 도스토옙스키의 답안지를 읽어보게 된 셈이다. 인간의 끔찍하고 비열한 충동은 양심만큼이나 벗어날 수 없는 본능이다. 죄와 벌은 끊임없는 생의 굴레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평화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냐가 사랑으로 라스콜니코프를 구원하고, 새사람이 되게 하고, 보다 고결한 목표를 품도록 한 것처럼. 그러나 인간이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었다면 이 소설에서 순결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증이 남았다. 이제 라스콜니코프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로 살아가게 될까.
" 하지만 여기에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점차 옮겨가고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며 점차 다시 태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435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