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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y 21. 2020

랑콤 화장품

소설 속 그 한 문장이 문제였다. “말하자면, 화장대 위에 랑콤 화장품이 잔뜩 있는 여자가 자살을 할리는 없다고 봐야지.”  


백화점이라면 동네 미도파 백화점과 엘리베이터 안내원 언니 밖에는 모르던 내가 그 소설을 읽었으니. 오해는 이미 시작됐다. 랑콤 화장품은 그런 거구나. 어떤 존재를 살아가게 하는 삶에 대한 열망. '화장품이 정말?' 하며 한편으로는 좀 우스우면서도 좋아하는 작가가 쓴 표현이니까, 왠지 랑콤 화장품의 향기라도 한 번 맡아봐야 할 것 같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화장품은 생각보다도 훨씬 비싸서 오빠와 나는 연신 서로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눈짓을 했다. 그렇게 공들인 보라색 포장지와 리본이 구겨질까봐 우리는 쇼핑백을 ‘모시듯’ 하며 밥 먹을 식당을 찾았다.   



아마 화장품 가격 때문이었을 거다. 왠지 우리는 동래파전 집에서 소주를 시켰고, 소주라도 마셔야 아까 들은 그 가격이 잊혀질 것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행복했고 어색했고 잘한 것 같다가도 잘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한 술은 지칠 줄 모르고 늘어갔고, 눈을 떠보니 다음 날 아침이었다.


맙소사. 오빠와 내가 마구 벗어둔 겉옷이나 가방은 다 있는데, 하필 그 쇼핑백만 보이질 않았다. 손이 벌벌 떨리는 걸 애써 감추며 결제한‘랑콤 화장품 세트’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냐고 혼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디 간거야,어디 흘린거야. 내 마음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려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열림원)


엄마는 어린 내게 “작은 시장에 가서 돼지 고기 반 근만 사와.”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쏜살같이 달려서 돼지 고기를 정말 딱 ‘반 근만’ 사왔다. 이상하다. 한창 자라는 오빠와 나, 건장한 청년이던 엄마와 아빠까지 우리 가족은 네 식구였지만, 고기는 언제나 ‘반 근’ 이었다. 엄마는 눈 감고도 제육볶음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건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었으니까.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다. 온 가족이 둘러 앉은 밥상에서 아빠는 혼자 그 ‘돼지 고기 반 근’ 을 정말 맛있게 다 먹는다. 내 기억이 미치는 한, 한 번도 다른 이에게 먹어보라고 권한 적이 없었다. 그건 언제나 ‘아빠 것’ 이라고 불리웠다. 그런데 밥상 한가운데 두는 이유는 뭔가.   


한 번은 엄마가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 치킨을 사줬다. 아빠는 모임에 갔고, 모르긴 몰라도 돼지 갈비 같은 걸 먹고 왔을거다. 늘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면 거나하게 취해서 옷에서는 갈비 냄새가 진동을 했었으니까. 그런데 웬일로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아빠는 집구석에서 애들한테 못된 버릇을 들게 한다며 소리를 질렀다. 오빠와 나를 무릎 꿇리고 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화를 냈다. 화를 내는 이유는 ‘치킨’을 시켜먹었기 때문이었다. 외식하는 습관이 들면 낭비를 하게 된다고 실컷 혼이 났다. 본인의 옷에서 진동하는 갈비 냄새에 취할 지경인데 먹고 환기까지 시킨 치킨 냄새를 맡다니. 참 대단하게 예민한 후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빠와 나는 새우깡 한 봉지도 마음 편히 먹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 가족의 차’가 아닌 ‘아빠 차’를 닦으며 용돈을 벌었고, 그 용돈을 모아서 새학기에 참고서를 샀다. 설에 친척들에게 받은 세뱃돈을 쪼개고 쪼개 일 년을 보냈다.


그 아빠 차를 타고 아빠가 다른 여자와 밀회를 즐기고, 또 다른 여자와 밀회를 즐기고, 술에 취해 다니는 동안 다시 오빠와 나는 세뱃돈을 쪼개고, 또 쪼개면서, 엄마는 제육 볶음을 만들면서, 누군가는 돼지 고기 반 근을 사러 내달리면서 살았다. 마치 계절이 가듯, 몇 개 월 동안 이어지던 밀회가 끝나면 아빠는 안방에서 동면을 취하는 동물처럼 몇 계절이고 쉬었다. 그러면서도 저녁이면 각자 자리에서 파김치가 돼서 돌아오는 가족들의 한숨 섞인 ‘돼지 고기 반 근’을 상 한가운데 두고 ‘혼자서’ 먹었다.   




경제력도 없는, 수없이 여러 번 외도를 저지르는,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남편이자 아빠를 우리가 왜 빨리 떠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오히려 아빠가 우리와의 이별을 선택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곳은 어린 자식들과 아내가 살아야 할 터전이었고, 그 터전을 먼저 져버린 건 아빠였으니까. 아빠가 정말 잘못한 건 외도와 폭력이 아니라 그러면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은 거라고, 우리를 놓아주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삶에 방패로 삼은 것, 가족을 학대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든 돌아와도 좋은 피난처로 삼은 것이라고.


점점 심해지는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왔다. 우리는 결국 삶의 터전을 잃었다. 아빠는 여전히 '혼자서' 그 삶의 터전을 차지한 채로, 공공연히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누라와 자식들이 늙어서 쓸모 없어진 자신을 버렸다고. 우리가 살던 동네에는 흉흉하고 씁쓸한 이야기가 가십처럼 흘렀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상상보다도 훨씬 견고하고 높아서 그 안에서 우리가 겪은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집을 나오고 얼마 안 있어 내가 다니던 대학의 지도교수가 면담을 오라고 했다. 교수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고 말하며, 방황하지 말고 집에 들어가라고, 아버지가 많이 걱정하신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아빠를 버린 딸이었고, 뒤늦은 방황으로 부모 속을 썩이는 못난 자식이었다. 난 성인인데, 내 허락도 없이 나의 사생활이, 거짓이 잔뜩 담긴 이야기가 되어 떠돌고 있었다. 무엇보다 학교는 나에게 자유를 알려준 곳이었고, 내가 그 어디보다 사랑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교수와 면담을 마치고 나오던 학교 복도는 전에 내가 알던 그 곳이 아니었다. 그래 끝내, 아빠, 당신이 이겼다.


나는 긴 자책과 원망의 시간을 거쳐야 했지만,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건 엄마도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오빠와 나는 돈을 벌며 대학원까지 공부했다. 우리는 스무살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을 했고,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그리고 비로소, 놓아주는 것도 사랑일거라고, 사랑까지는 아니라면 적어도 용기 쯤은 될 거라고 나지막하게 되뇌인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에 사치란, 아름다움이란 흔치 않았다. 희귀하고 드물었다. 그래서 그 날 오빠와 나는 엄마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비싼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돼지 고기 반 근에서 놓여난 걸 축하해요, 새우깡이랑 치킨도 맘껏 먹어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해보지 않은 일은 어색하고 부대꼈고, 우리는 그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술로 채웠다.


지금은, 엄마한테 랑콤 크림 하나 정도는 사드릴 수 있게 됐지만(요즘은 랑콤이 얼마. . . 아, 내가 왜 이러지?) 아직도 우리는 모이면 그 날을 얘기한다. 우리 삶에도, 절박함이나 생활이 아닌 무언가가 처음 나타났던 그 날을. 비록 신촌 길거리 어딘가, 혹은 동래 파전집 의자에, 그것도 아니면 택시 뒷자리에 고이 두고 오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보라색 포장지와 리본을 기억한다. 랑콤은 우리에게는 소설에서 읽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인상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그 날의 받지 못한 랑콤 화장품을 떠올리면 세상 전부를 가진 것처럼 반짝 빛나는 엄마의 눈이 말해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드디어 자유로웠던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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