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Jun 16. 2020

아름다운 것들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장터를 차를 타고 지날 일이 있었다. 장터라고 하지만 왕복 2차선 도로 옆으로 가게들이 드문드문 있는 길처럼 보였다. 장을 봐서 숙소로 돌아가야 했던 우리 가족은 차를 한 쪽에 세우고 내려서 장을 보고 다시 차를 조금 더 몰고 가다가 다시 차를 세우곤 했다. 아빠 엄마는 필요한 것들을 얼른 사올테니 잠깐만 차에 있으라고 말하곤 얼른 차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갔다. 그러면 나와 오빠는 차 뒷좌석에서 창밖을 구경하거나 장난을 치며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창 밖의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시장 안의 가게들은 하나 같이 낡고 오래돼 보였다. 그 중에서도 어떤 가게들은 원래의 간판 색이 뭐였는지 알아볼수도 없을 만큼 낡고 글자 중 일부는 완전히 떨어져 나간 채여서 닭이 아니라 ‘닥’ 이라던가 참기름이 아니라 ‘참ㅣ름’ 이 돼 있었다. 그런 가게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났다. 그 가게 앞 평상에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얼굴로 앉아 있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쳐서 였을까. 저렇게 간판이 낡아버리도록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는 게 슬퍼졌다. 저 아저씨의 가족이 많이 아팠을까, 아니면 아저씨가 많이 아팠을까, 아니면 이런 시골에 살기 싫다고 떠났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본인의 사업도 망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걸까, 그런 상상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슬퍼졌다. 처음 저 간판을 달 때, 글자는 무슨 색으로 할까, 닭을 더 크게 써야지, 참기름할 때 참에 동그라미를 넣자, 의욕적으로 고민했을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판을 결정하고 제작을 기다리고, 잠을 설치며 간판을 달 날을 고대했겠지. 여기서 어서 자리를 잡아서 애들 학교도 보냅시다, 막내가 공부를 잘하는데 서울로 유학보내야 되지 않겠어? 하면서.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걸고 가게를 차리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세월을 견뎠을 거다. 이 도시에 도로가 난데, 우리 동네는 언제쯤 재개발이 될까, 헛된 희망도 가졌을 거고, 아이들은 정말로 그 가게에서 번 돈으로 서울로 유학을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떠나고 이제는 누구도 잘 찾지 않는 쇠락한 시골이 돼버린 이 마을에서, 저 낡은 간판처럼 지치고 허물어져버린 것이다. 




김영하의 여행기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서 작가는 아내와 함께 시칠리아를 여행한다.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유명한 관광지 대신 시칠리아를 선택하고 그 중에서도 쇠락한 소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마치 ‘번화한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서울에서 꽤 성공한 삶을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외면적인 성공이 자신의 내면을 쓸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책의 소개처럼, 그는 ‘자신의 삶이 변화할 것’이라고 예감한 그 때 시칠리아의 변두리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이 도시들에 머물면서 그는 말한다. “아름다운 것들을 오래 버려두면 안된다”고. 인간은 특출나게 뛰어난 것에 관심을 가지도록, 호감을 느끼도록 진화해 왔지만 그는 그 본능이 썩 탐탁하지 않은 것 같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처럼, 자신이 서울살이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 떠난 시칠리아 여행을 통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잃어버리고 있는 ‘그것’이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복복서가) 


나태주의 유명한 시구처럼,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말은 살아갈수록 진실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것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것을 발견해내는 시선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김현은 “아름답다의 아름은 알음알음의 알음, 앎의 대상이다. 아는 물건 같다가 아름답다의 어원”이라고 했다.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 지성사) 


보통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이미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말은 사실 그것을 얼마나 오래 바라보느냐에 달린 일이 아닐까. 다시 말해 그것을 자꾸 바라보고 관찰하고, 반갑게 느끼며 알아가고 싶은 마음과 대상 전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아름다운 것은 어떤 것이든 가능하고, 그것의 외면이 어떤 모양이든 상관 없다. 그것이 추상적인 가치여도, 남들이 흉하다고 하는 모양이어도, 오래 보고 알아가고 싶은 대상이라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고 이미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까 김영하가 말한 “아름다운 것들을 오래 버려두면 안 된다”는 말은 실은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고 애정을 퍼부었던 그 처음 마음을 쉽게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우리는 처음 호감을 느껴 애정을 쏟는 데는 전문가들이지만 그 대상을 오래도록 아름답게 만드는 데는 미숙하니까.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기에는 이 세상의 존재들은 나를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보는 대상에 의해서 새 생명을 얻곤 하니까. 또한 모든 존재는 그러한 시선을 원하니까. 사랑이라는 말은 곧 영원히 당신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보겠다는 약속 과도 같은 거니까. 


오랜 세월 서로가 변화하는 걸 지켜보면서, 처음처럼 서로를 ‘아름다운 것’으로 남겨두려고 노력해온 것들을 보면 마음이 뭉클하다. 그러니까 낡은 간판이어도, 색이 벗겨진 곳에 어설프게 페인트 칠을 하고, 글자가 떨어진 자리에 종류가 다른 재료로 ‘ㄱ’ 자를 깎아 달아놓은 것들을 보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삐뚤빼뚤한 세월의 흔적보다 나를 더 감동하게 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어린 나는 온갖 ‘새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안다. 낡고 오래된 것들, 버려지지 않고 보듬어진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그건 그 대상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또 바라봐 온, 누군가의 세월이며 애정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랑콤 화장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