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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n 17. 2020

책을 리뷰한다는 건

이제는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과거에는 예술가라면 왠지 들쭉날쭉한 생활 패턴, 영감이 올 때까지 일상 생활은 다 내팽개쳐두고 술을 마시거나 방랑자처럼 목적지 없이 거리를 배회할 것만 같은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 된 그들의 삶이란 '의외로(?)' 규칙적이고 성실했다. 실제로 만난 그들은 영감을 무작정 기다리는 게 아니라 늘 정해진 시간에 작업실에 앉아서 영감이 나타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수도승 같았다.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아서도 한참이나 깜빡이는 커서를 보고 있다. 나는 주로 '내킬 때' 글을 써왔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이 떠오르면 며칠이고 머리 속에 마음 속에 묵혀 두었다가 어느 날 문득 모니터 앞에 앉아서 주르륵 쓰는 편이었다. 그러다보니 놓치는 주제가 많아졌고, 내 글이 나아지는 걸 느끼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좀 더 성실하게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무 것도 써지지 않는데 뭔가를 쓰기 위해 하얀 종이를 맞닥뜨리면 갑자기 화장실이 급한 것처럼 조바심이 나고, 그러다 심장을 옥죌 듯이 마음이 갑갑해지는 것이다. 은유는 그녀의 책에서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동작이다. 낫이 아니라 낫질"이라고 했다. 김사과는 "글을 쓰는 나는 가장 높은 곳에도 가장 낮은 곳에도 갈 수 있지만, 쓰지 않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는 글쓰기를 두고 "척추를 굴렁쇠처럼 구부리고 책을 들여다봐야 하는 긴 노동"이라고 했고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삶을 관통하는 깨달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조금 하는 것, 진정한 노력이라는 구원적 행위의 차이를 보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노력을 하지 않고 글쓰기(혹은 삶에서 소중한 무엇)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일까, 지금까지 작가란 언제나 좀 멀리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마음 속에 뭐가 들었는지 도무지 다 알 수가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감정이 그들의 책을 좀 더 특별하게 느끼게 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실 작가란 누구보다 이 세계와, 이 사회와, 그리고 이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사람이 아닌가. 혼자 골방에서 궁리하는 게 일인 사람들이지만, 누구보다 사람에게 관심이 많고, 부조리에 분노하고, 고통에 민감한 그들. 그들이 부끄러워서 입밖으로 소리내 말하지 못해도 그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이며 따뜻한 사람들일 거다. 또 늘 비슷하게 생긴 책을 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모든 책의 규격과 종이 재질, 인쇄된 일러스트와 글씨체, 페이지 표기법까지, 어느 하나 전과 똑같은 건 없다. 그 모든 것이 작가라는 존재들이 보내는 소통의 신호이며 그 신호가 계속되는 한 나는 그들의 책을 읽을 의향이 있다. (동시에 나도 더 열심히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부끄러워서 괄호 안에 적음.)



나의 리뷰에는 그 흔한 별점이나 줄거리를 요약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건 우선 내 능력이 그들의 책을 비평할만큼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고, 줄거리만 요약한 독서 감상문은 서평으로 부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그 책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을 나누고, 또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함께 생각해보자고 손을 건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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