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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an 07. 2021

김사과, <0이하의 날들>


어떤 피드를 본 적이 있다. 그 피드에서는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별점도 매기고, 감상과 한 줄 평을 남기고, 줄거리도 요약하고, 기억에 남는 글귀까지 올려두고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어떤 책의 별점을 다섯 개 중 두 개 주었고(그래서 이런 언급을 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정말 두 개라고?" 몇 번 되뇌기는 했다), 감상의 마지막 줄에는 "제 취향이 아니라 절반 정도밖에는 못 읽었다"는 코멘트가 있었다. 절반밖에 못 읽은 책에 별 점을 두 개 주는 건 용기일까, 그러면서도 그 책에 있는 글귀를 골라서 자기 피드의 페이지를 채우는 건 역시 경제적인 태도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판이나 칭찬이나 결국 내 자유라고 생각하면 참 손쉽지만, 어느 쪽이든 내 것이 아닌 것을 대할 때는 공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라고 주절거리는 이유가 대체 뭘까. 아무래도 그녀의 책이 보편적으로 사랑받을 것 같지가 않아서겠다. 라고 적으려니 그녀가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그녀의 산문집을 보며, 등골이 서늘했다. 소설가 자신이 이 시대의 소설에 대해, 문학에 대해 비판한다는 건, 심지어 그걸 책으로 엮어 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쓰는 그녀 자신도 등골이 서늘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내가 소설가라는 것이다. 내가 비난하는 세계에 나 또한 이미 깊숙이 속해 있다. 그리고 이런 모순이 나를 냉소로 이끈다. 모든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특히 소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바꾸는 건 소설이 아니라 화가 난 시위대다. 그건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학은 죽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불가능한 모든 것들을 원하고 있다." (본문 중)


신형철은 그녀의 소설 <풀이 눕는다> 중 한 구절을 예로 들었다. "그러니까 돈 따위가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 사랑 안에서 굶어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었다."(김사과, <풀이 눕는다>, 문학동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작가는 어디에선가 나쁜 어른이 되지 않는 게 당면 과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른의 어른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소설을 써야 하고, 나쁜 어른들이 그 소설을 읽어야 한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예상대로 그녀의 책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다. 그러니 이런 '취향'이 아니라면 건너뛰어도 좋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한번쯤 물어본 적이 있다면, 모든 '다름' 속에서 '틀림' 마저 그저 다른 것으로 뭉뚱그려진 혼란스러움에 어지럼증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우린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길의 끝엔 뭐가 있나, 다른 세상이란 가능한 것인가, 아니 지금 존재하는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인가, 따위의 구식 질문을 던지지 않고 거침없이 하찮아진 예술'에 분노하고, 나약한 이들의 자기방어가 끝내는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어버린 현실에 아파하고, 우리의 '안전한 세계'가 누군가의 '위험한 세계' 위에 발딛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고급한 취향'을 '은근하고 세련되게' 표현하는 행위에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찾는 젊은이들의 세태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부분이다.


현재 자신은 (시대적인 한계로) 부자도 아니고 부자가 될 수도 없지만, 성장기에 부모의 조력으로 이런저런 고급한 취향을 접한 (중산층) 젊은 세대들 중 다수는 그 취향에 자신의 계급적 실존을 걸게 되었다. 그들은 슬프게도, 스스로는 절대 '진짜 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남들은 잘 모르는' 취향, '은근하게 과시할 수 있는' 취향만이 스스로를 현재 계급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준다고 믿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그 취향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며 '사수'하는 건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내가 특별한 건 남들은 모르는 고급한 취향을 가진 덕분이니까. '노골적으로' 취향을 드러내는 건? '촌스럽고' '못배운' 행동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고급적 취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하고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경외하면서 스스로를 자신이 만든 '취향' 안에 가둔다. 작가는 덧붙인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폐쇄적이고 심미적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심미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힌 채 세계에서 격리된 채로, 우리들만의 탁월하게 심미적인 승리에 취한 채로, 그 승리를 매일 그리고 주말, 거리와 해안가, 콘서트홀과 페스티벌, 소규모 갤러리와 까페에서 반복할 것"이라고. 소비 패턴에 담긴 계급성과 차별성, 심리적 허기와 현실과의 괴리까지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고급한 취향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저급한 취향을 가진 누구와도 손잡을 수 없다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김영하의 말을 떠올렸다. 작가는 한 억만장자를 소개한다. 그는 집도 차도 가지지 않고, 그러면서도 아무 때나 퍼스트 클래스에 앉아서 원하는 나라의 원하는 도시에 가고 최고급 호텔에서 원하는 만큼 머무른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소유란 부질 없어요. 귀찮은 일이죠." 그는 그렇게 '소유하지 않음'까지도 소유해버린다. 이때, '소유하지 않는 것'도 부자가 '선택'한 삶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며, 그저 가난하기 때문에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서 다시 한 번, 더욱 철저하게 소외된다.


어쩌면 가난의 상징이었을 '소유하지 않음' 마저도 부자에게 빼앗긴 사람들과, 자신만의 고급한 취향에 생존을 건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활을 이고지고 어딘가를 올려다보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들이 부족한 건 더 이상 '자본'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이 부족하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자신'을 빼앗긴 채로 한없이 성마르고 사나워진다. 나는 그 둘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날카로운 비판에 이리저리 찔리며 허둥댄다. 다 잊어버리고 눈 감고 싶어진다. 그때, 당신 마음 다 안다는 듯이 작가는 말을 건넨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의문을 갖게 된다. 현실이란,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삶이란, 사실 끔찍할 뿐인가? 그런 생각은 염세주의와 뭐가 다른가? 결국 자연주의란 염세주의의 다른 이름인가? 냉철하게 삶을 인식하는 것과 삶에서 어떤 가능성도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이를 먹고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시니컬하게 변한다. 어떤 가능성도 믿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그게 유일한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냉소와 현실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고 믿는다." (본문 중)








그녀의 책을 덮으며, 어떤 비판이란 울면서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밉기 보다는 사랑해서, 그러지 말라고, 거기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건 '두려워하지 않는 응시'일 뿐이라는 선언같은 말에도 나는 눈물에 축축히 젖은 눈이 떠오른다. 정혜윤의 말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일 테니까. (정혜윤, <아무튼 메모>, 위고) 그 대단한 일이란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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