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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by 이상희


과거에는 선과 악이 분명해 보였다. 독재는 나쁘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건 나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고도화하고 사회의 논리가 변화하면서 이제 선과 악의 구분은 불분명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도 완벽하게 선하거나 완벽하게 악할 수 없다. (물론 언제나 인간이란 완벽하게 선하거나 나쁘지 않다. 이건 인간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누군가가 나쁘고, 누군가는 선한 대결 구도가 명맥을 이어왔다. 과거처럼 권선징악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사람들은 극을 보면서 결국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대상을 찾게 마련이어서 주인공은 얼마간 나빠보이지만 결국 선하고, 생각보다 더 선하고, 악인 코스프레를 하면서까지 선했다.


'비밀의 숲'을 집필한 이수연 작가의 드라마 <라이프>는 그런 면에서 좀 이상하다. 사람의 생과 사가 오가는 병원을 배경으로 펼치는 이야기인 것까지는 알겠는데, 이건 의학 드라마도, 그렇다고 스릴러도, 그렇다고 미스터리도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의료 민영화라는 화두를 건드리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파업은 실패하고 그럼 이건 모두 사장의 농간 이었나?! 하는 순간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그럼 이렇게 사장이 악인?! 하는 순간 그 사장은 실은 화정 그룹 회장이 벌일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고, 그럼 회장이 악인?! 하는 순간 문제가 그것뿐일까? 라고 또 질문을 던진다. 여느 드라마에서는 극 전체를 끌고 갈 법한 사건과 주제를 평균 1-2회만에 종결지으며 드라마는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그렇다고 드라마가 산만하느냐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니다. 사건은 연이어 발생하고, 등장인물은 다양한데도 이야기가 산만하기보다는 되려 안정적이다. 안정적인데도 상투적이지가 않다. 아, 나는 갑자기 드라마의 제목을 떠올린다. '라이프(life)'. 이거 그냥 '사는 얘기'구나.






드라마 속 인물들은 그냥 살아 가고 있다. 여느 드라마처럼 드라마적인 상황에 돌입하는 게 아니라 우리 생활 어느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실제 같은 세상에서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느 간호사(이상희)는 노조 활동에 열성이고 환자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지만, 자기 후배 간호사에게는 극악한 선배일 뿐이다. "저 환자 죽고 나면 체크할래? 그럼 너도 네 부모 돌아가시면 그때나 뵈면 되겠네." 그녀는 이런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러면서 말한다. "내가 태우고 싶어서 그래요? 우리도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 거에요." 그녀를 좋은 감정으로 지켜보던 장기이식센터의 코디네이터(태인호)는 그녀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거짓말하지 마요. 군대에서 전방일수록, 위험한 지역일수록 내부적으로는 분위기가 좋아요. 우리 모두 거지 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서로라도 힘이 돼주는 거에요." 남자는 돌아선다.


응급의학과의 예진우(이동우)의 동생(이규형)은 어릴 적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구이고, 예진우는 동생의 장애와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탓인 것처럼 느끼며 죄책감을 벗지 못한다. 예진우는 병원에서는 실력 좋고 책임감 있는 의사이지만 그에게는 다리가 다치지 않은 동생의 환영이 늘 따라다닌다. 장애인인 동생은 사랑하는 여자(원진아) 앞에서 언제나 '필연적으로' 약자가 돼야만 하는 스스로를 견디기 힘들다. 그는 의대를 나올 만큼 똑똑하지만, 불편한 몸으로 실습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욕심 아니냐며 끝까지 자신의 수련을 거부한 은사(문성근)(?) 덕분에 모교에서 수련을 받지 못했다. 드라마는 그가 꿈 같은 사랑에 성공한다고 포장하지도, 장애를 딛고 일어서려는 그의 노력을 주변 사람 모두가 발 벗고 나서서 돕는다는 환상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우리는 분명, 노조를 분쇄하고 임금을 삭감하는 사람이 악의 최종 결정권자이며 그보다 더한 악한은 없으리라고 믿으며 살았다. 하지만 드라마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사회에서 살아 있는, 동시에 사라지지 않을 권력은 돈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재벌들이 그 돈의 거의 대부분을 독식하고 있음을. 구승효 사장(조승우)은 말한다. "우리 나라 재벌들이 어떤 일에든 타격 입는 거 봤습니까? 그런 거 안 받습니다." 전 같으면 악의 화신으로 그려졌을 구승효 사장은 거대한 자본 아래서면 '우리와 비슷한 처지'이다. 그도 그저 월급쟁이 회사원일 뿐이다. 그때 느끼는 허망함이란, 드라마의 대사처럼 "구승효 사장이 못하는 일도 다 있네."하며 내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지는 느낌. 드라마는 묻는다. 대체 누가 누구랑 싸우는 거냐고. 나서서 돌팔매질 당해주는 구승효 사장을 앞세워 정말 우리를 옥죄고 착취하는 누군가는 유유히 제 갈길을 가고 있다.


병원을 쪼개지 말아달라는 구승효 사장에게 화정그룹 회장(정문성)은 말한다. "상국 병원? 10년, 아니 5년만 지켜보자. 자본 앞에 스스로 포기하는지 안하는지. 나는 돈이라는 이익이 주어졌을 때 그걸 선택하지 않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어." 김사과는 그녀의 책에서 말한다. "자본의 채찍질 없이도 기술의 발전은 가능하며 아름다운 시는 쓰일 수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단지 믿음이 아니라 상식인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해내야 한다. 그것은 고되고 지난한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이 스케치에 불과한 비전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우리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김사과, <0이하의 날들>, 창비, 2016)


그러니 드라마의 제목처럼 우리의 삶(life)은 계속되고, 드라마는 끝났지만 어딘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마치 멀리서 내 사는 꼴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기분. 당연히, 좋을리 없다. '당연히' 좋을리가 없어서 당연히 기분은 더 안좋아진다.


자본이라는 '권력, 환상, 희망, 신, 절대자' 아래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우리의 삶.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상국대 병원은 과연 화정 회장의 예언(?) 대로 스스로 자본 아래 무릎을 꿇을까. 그들이 그렇게 분투하는 동안 현실 속의 우리 삶은 어디로 갈까.


드라마 마지막 화에 이르러 민영화와 관련된 주요 인물 세 명 - 신경외과 오세화 과장(문소리), 흉부외과 주경문 과장(유재명), 구승효 사장 - 이 마주 앉아 처음으로 밥을 먹는 장면은 작가가 건네는 아주 조심스러운 희망 같이 느껴진다. 그들은 '돈' 말고 다른 얘기, 이를테면 철지난 유행가 얘기나 세대 차이 얘기를 하며 끼니를 나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숨 쉴 틈 없이 밀려오는 거대 자본의 파도 앞에서, 인간인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건 고작 그 작은 밥상 하나일 뿐이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마주 잡은 손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나 역시 별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 확인이 희망의 단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처럼 조금은 불안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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