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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07. 2020

이근화,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남자 아이를 하나 낳아 기르고 있는 친구와의 대화.

"부지런한 엄마들은 자기 전에 인스타에 사진도 올리고, "내일 더 사랑할께" 이런 코멘트도 쓰던데. 나는 게을러서 그런 것도 못하네." (친구는 육아에 지침과 육아를 더 잘하지 못함 사이에서 늘 괴로워한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던 사람이 맞나 싶게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 한 생명체를 돌보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어떤 무한한 책임감과 애정, 절대적인 피로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완전한 '기댐'은 어떤 사랑보다도 강력해서 친구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습마저 목도하는 중이다.)

육아 문외한인 내가 철없이 대답한다. "요즘은 그런 것보다 "아들 너 내일 보자. 자고 일어나면 얘기하자" 류가 훨씬 더 설득력 있고 끌리더라."


과거에는 사랑의 모습이, 표현이 언제나 아름답고 부드럽기만 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사랑한다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부드럽게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늘' '언제나'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일종의 편견이다. 아름답지 않은 것, 부드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애써 아름다운 것처럼 부드러운 일처럼 말하는 건 사랑이라는 핑계로 거짓말을 하는 거니까. 사랑과 거짓말처럼 모순되는 관계가 어디 있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아름답고 부드러운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때론 단호하지 못한 것도 사랑이 아니라고 본다.


작가의 직업은 시인이고 함축적인 언어로 삶과 사람을 통찰하는 게 일인 사람답게 그가 고른 단어들은 정곡을 찌른다. 아름답고 부드럽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비겁함이 없다. 보기 싫은 건 외면하는 이기심이 없다. 뭐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보이는 그대로 인정한다. 그것이 나의 부끄러움을 비추는 일이라도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 정곡을 찌르는 시선이 쓸데없이 공격적이지 않다. 그 시선이 서늘하기보다는 포근하다. 아픈 곳에 일침을 가하는 게 아니라 새살이 돋으라고 해를 비춘다.


나는 시는 잘 모르지만 시인이 쓴 산문을 볼 때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오랜 시간 공들여 관찰'한 것을 볼 때의 느낌. 어떤 것도 외면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포용력 같은 것. 네 아이의 입에 들어가는 밥알 한톨부터 지구의 여러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는 애틋한 마음. "다만 글쓰기가 경계를 넘어서고, 구멍을 만들고, 틈을 벌리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라는 표현 속에는 어떤 강경한 주장보다도 강한 의지가 보인다.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애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검색창을 켜 그의 이름을 검색하고 그가 쓴 시들을 읽는다. 그의 책을 또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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