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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an 28. 2021

홍은전, <그냥, 사람>


명료한 문장, 분명한 언어, 확고한 메시지.


그녀의 책을 이토록 오래 읽을 이유가 없었다. 평소라면 한 두 시간이면 읽었을 만한 조건이지만, 그 내용 때문에, 그 내용 안에 살아 있는 생명들 때문에 몇 번이나 멈췄다 읽어야 했다. 일부러라도 오래 읽어야만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 바탕에서 상대방에게 깊이 공감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일텐데, 그녀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자신이 공감하고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살아갈 방법을 고민한다. 살아갈 방편을 마련한다. 어디 사람 뿐이냐며 그녀는 다시 성큼 나아간다. 고양이와 함께 살며 '평생 쌓아온 세계를 한 방에 무너뜨리며 온 혁명 같은 앎'도 얻는다. '사람'이 전부였던 그녀의 세계는 다시 동물 전체로, 차라리 생명 전체로 확장된다. 나는 읽는 내내 '잠깐, 잠깐'을 외친다. 나는 아직 '사람' 사이에서 공평한 것도 버겁다구요.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시설에서 수십년 동안 벽과 천장만 보면서 살다 간 수많은 장애인들의 삶, 하루아침에 삶의 근거지를 잃은 철거민들의 삶, 장애인 가족을 돌보며 동시에 스스로의 삶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많은 이들의 삶, 기막힌 사고로 사랑하는 이들을 어이 없게 잃고 남아 있는 이들의 삶, 이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이자 가장 중요한 고리인 '소외되고 아픈 이들'의 삶을 곁에서 듣고 보고 함께 울며 적어낸 글들.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 읽은 후에, 나는 순도 100퍼센트의 기쁨이나 쨍한 즐거움이 좀 어렵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들을 잊을까봐 조금은 두려워하고 있다. 어느 날은 내가 그들을 잊지는 않았는지 확인한다. 시설에서 겨우 빠져나와서 4년 만에 엄마와 통화하며 늑대처럼 '우, 우'하고 울었다는 조현성을, 지하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려다 영원한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는 한경덕을, 차가운 바다에 자식을 묻고도 다시 또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예은 아빠 유경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도 오랫동안 리뷰를 하지 못한 이유는, 그래서? 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알게 된 후로 전과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어떤 뾰족한 길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 삶의 어느 부분을 얼만큼 변화시켜야 하는건지, 사회의 변화는 어디서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는건지,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등등. 나에게는 책 한 권이 아니라 차라리 세상 전부가 물음표로 다가왔다. 더는 유리창 밖에서 가엾다, 딱하다 말하며 만족할 수가 없다는 감각만이 선명하다.


변화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생각하며 뭔가를 선택하고, 그들과 내 삶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걸 자주 느낀다. 자주 기억한다. 그런데도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느냐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동시에 여전히 그들의 삶을 평면적으로 느끼고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에는 속상한 것이다. 나에게 실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안타깝다, 안쓰럽다는 상투적인 단어가 먼저 튀어나오면 머쓱해지는 것이다. 그 단어들 안에는 그들에게도 나와 같은 욕망이 꿈틀대고, 그들이 스스로 멋진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배제된다. 그렇게 나는 다시, 다시, 다시 그들을 배운다. 그들에게서 배운다.








그리고 참 면구스럽게도, 그녀의 다음 말이 이어진다.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나 전태일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내 곁에서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 얼마간의 책임이 있고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고통을 기록하는 마음은 광장에서 미경 씨의 머리를 밀어주며 "죄송해요"라고 말했던 여성의 마음과 비슷할 것 같다. 바라는 것은 그가 나에게 안심하고 자기의 슬픔을 맡겨주는 것이고, 나는 되도록 그의 떨림과 두려움을 '예쁘게' 기록해주고 싶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세상은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


그녀는 말한다. 그저 기억만 해달라. 당신의 삶 바로 곁에, 혹은 당신과 함께 이 모든 아픔들이 기적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밀쳐내지만 말아달라. 이들의 처절한 삶을 부정하지만 말아달라. 이들의 존재를, 아무개가 아닌 각자의 이름으로, 각자의 고통으로 기억해달라. 그거면 된다.


그런데 그녀도, 그녀가 말하는 이들도 나보다 먼저 웃는다. 나보다 먼저 명랑하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들의 삶은 딱해서 보듬고 싶다기 보다는 멋있어서 따라살고 싶어진다. 예쁘게 기록해주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어쩌면 자신감이었나보다. 자신이 만난 그 아름다운 존재들에 대한 자신감. 나는 그저 그대로 기록하면 된다는 확신 같은 것.


이 순전하고 티없는 설득에 넘어간다. 이들을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전부가 아닌 걸 알면서도 속는다. 기억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연대다. 잊지 않는다면, 변화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기에.






덧, 남편에게도 이 책의 여러 장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우리는 함께 울었고, 서로 위로했다. 그 이후로 약속한 게 아닌데도 우리는 쉽게 '힘들다'거나, '짜증나' 같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보다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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