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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Feb 04. 2021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이야기를 읽을 때, 등장하는 인물들이 소외되지 않고 고르게 다뤄지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 반대로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그가 아무 서사 없이 단순한 '장치'로 등장했다 사라지는 걸 보면 흥이 좀 떨어진다. 뭐야, 저 사람 저거 하라고 데려다 놓은거네. 때로는 저런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다가 끝내 이야기 자체의 힘 마저도 잃어버리는 걸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생각하는 것이다. '한 세계를 구축하는 일의 방대하고도 섬세한 결에 대해.' 과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는 아주 든든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마도, 소외당하는 인물이 없을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정말로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불필요하게 소비돼버리는 인물 없이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각자의 자리에서 의미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난 명혜가 마음에 들어, 난정이가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 우윤이를 보면 내 어린시절이 생각나. 이 책을 읽다보면 생생하게 묘사된 인물에게 공감이 되어 마음이 흔들리거나, 반대로 어떤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특히 화수와 지수에게 마음이 갔다.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게 화수였다. 균형 감각이 좋았다. 온화하면서 단호한 성격, 과거를 돌아보되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되 틀어져도 유연한 태도, 살면서 만나는 누구와도 알맞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판단력, 일과 삶에 에너지를 배분하는 감각. . . . . 이를테면 요새 유행하는 명상 앱의 차분한 목소리를 닮았던 것이다. 현재에 건강히 집중하는 모습이. 그런 화수가 넘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넘어져도 바로 일어설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떤 미친놈의 태클에 이렇게 오래 엎드려 있을 줄은 몰랐다. (본문 중)


화수는 단지 균형감각이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런 균형감각을 가졌다는 건 그녀가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그 섬세함이나 예민함을 무기삼기보다는 모두가 편안한 방법으로 사용하며 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자신이 무게추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쪽이나 저쪽으로 가서 서는 게 아니라 늘 가운데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 그런데 그게 또 이쪽 저쪽을 선택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것과는 좀 결이 다른데, 그는 선택이 필요할 때는 단호하기 때문이다. 그 단호함은 선택의 기준을 '나의 이익'에 두지 않아서 얻어진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아예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까. 드러내지 않음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감각. 그런 균형감각은 쉽게 길러지지 않는다.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공감해야 가능한 일이고, 지금이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인지를 판단할 줄도 알아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되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되 틀어져도 유연한 태도', 라는 부분에서는 파우스트가 떠오른다. '강인한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반드시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까지 생각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화수가 가장 불합리하고 괴로운 일을 겪게 된 것이 못내 마음이 쓰이면서도, 그래야만 우리가 이 모든 고통의 실체와 속내를 낱낱이 들여다 볼 수 있을테니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 화수가 아니라면, 얼른 툴툴 털고 일어나(는 척을 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고, 섣부른 용서를 말하면서 또 다른 악행이나 불합리를 겪은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전파하려고 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럴 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은, 사람들에게서 악행이 제일 먼저 잊힌다는 것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기억해야 할 일을, 가장 먼저 잊는다.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면 참 불행한 마음이 된다.

그녀는 후에 상헌에게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라고 말한다. 이해한다.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이라는 말 까지도. 그녀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겪은 이 부당함의 껍질이 완전히 벗겨져 그 실체를 드러낼때까지. 그리하여 누구라도 그 부당한 공격들로부터 상처 입지 않아야 하니까. 그녀는 그런 대의를 소리내어 말하지 않지만,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 희망을 걸어보게 되는 건 우리가 이미 그녀의 심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넘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말처럼, 스스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위안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알아야겠다는 것이다. 설명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차라리 싸우고 있다.

나는 그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는 것이 곧 그녀 안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 되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기를 비는 마음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악이 우리 내부에 자리하지 않기를 온 힘을 다해 바란다. 악을 내면화하지 않고도 그것을 버텨나가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내내 고민하고 있다.


 




"이모, 내가 좀 그런 얼굴이잖아. 어느 나라를 가도 현지 사람들이 길 물어보는 얼굴. 그리고 좀 배고파 보이는 얼굴이기도 한 가봐. 다들 나만 보면 뭘 그렇게 먹이고 싶어하더라? 동네 반찬가게 사장님이 나만 들어가면 안녕하세요, 말할 새도 없이 입에 음식을 넣어주더라고." (본문 중)


작가의 전작인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민음사)


'친절함은 이 시대에 가장 저평가된 덕목'이라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에게는 친절함이 아주 많은 것을 함축한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시선으로부터, 에서 가장 친절한 인물이라면 단연 지수다. 그녀는 괴로워하는 언니 화수에게도, 어린 시절에 난치의 병으로 고생했던 사촌 우윤에게도 가장 마지막까지 친절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좀 모자란 게 아닌가'라는 고민을 한다. 아픔에 공감하는 것, 포기하지 않고 친절한 것은 보통의 능력이 아니지만, 세상에서는 그 반대의 가치만을 높이 산다. 값을 매긴다. 누군가에게 공감하고 그 곁에 머무는 것보다는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남의 고통을 보듬기보다 우선 스스로가 강해지기를 주문한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나약하다고 낙인 찍는다. 지수는 평범치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그나마 스스로의 타고난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는 편이다. 지수의 성정을 적어도 나약함이 아니라 특징으로 보아주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자신이 남보다 모자라고 나약하다고 흠집내고 미워하며 끝내 이 커다란 능력인 공감과 친절을 감춘다. 그러면서도 괴로워하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린다.


하와이에서 지수가 사귄 친구 체이스는 그런 지수에게 용기를 준다.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열려 있는 사람이라 변화에도 적극적인 거겠지.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확 느꼈는데. 열려 있는 사람이란 거. 튼튼하게 활짝 열리는 창문이나 공기가 잘 통하는 집처럼." (본문 중)


지수는 열쇠 같은 사람이다. 그것도 만능 열쇠. 그녀는 자신이 그 방에 들어가서 뭔가를 쟁취하기를 욕망하기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돕는다. 그녀가 다가가면 아무리 꼭꼭 닫혀 있던 문이라도 자연스레 열린다. 그건 능력이다. 우리가 그런 것도 능력이라고 바꿔 생각하기만 한다면, 우리 주변에 이런 능력자들은 꽤 많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보다 타인의 이야기에 더 귀기울이는 사람, 남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사람. '고집도 없다', '너무 착하다' 는 말 뒤에 가려진 그들의 진짜 능력이 더 많이 발현될 때, 그들 덕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 싹 닫고 모른체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전문가에게 의뢰하듯 그들에게 부탁하고 그들을 존중할 때 이 세상도 좀 더 밝아질 것이다. 더 많은 문이 열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두고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여자들은 모두 고르게 소리내어 말하고 커다랗게 내딛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면 작가에게 '사랑'이란 이런 모습인가보다. '스스로를 살아내는 것.' 그들은 실패나 성공의 순간을, 대부분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과정의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이건 아주 중요하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나의 삶,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어서 그 시간들이 위로가 되었다. 아직 소리로, 행동으로 드러나지 못한 '나'를 드러내려고 내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린다. 우리는 안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그것이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우리는 당신을 응원할 것이다. 나는 나를 응원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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