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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Feb 18. 2021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과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 를 읽다가 작년 한 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을 이제서야 읽고 싶어졌다. 난 가끔 이렇다. 사람들이 좋아요 좋아요 많이들 그러면 당시에는 그 책을 못 읽겠다. 읽는 내내 '좋아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내 독서를 압박받는 기분이랄까. (뭐래-_-) 그렇다고 남들이 좋다고 하면 싫어지는 청개구리 같은 마음도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의 부담이 없는 상태로 책과 만나고 싶은 마음일 뿐. 그래. 내가 여러 모로 불편한 인간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이 책이 "좋아요" 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고, 이야기 하나하나를 되짚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집중이 되었다. 포스텍에서 화학과 생화학을 전공한 작가는 만약 나라면 '신비롭다' 정도로 설명하고 말았을 현상들에 대해 친절하게 과학적 설명을 덧붙인다. 작가는 과학이 발전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거기에는 유전자 조작으로 어떤 '결함'도 없이 완벽한 사람만 태어나는 세계가, 죽은이의 '마인드'를 구축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와 연결될 수 있는 세계가, 감정을 '물리적'으로 구현해내고 소유하는 세계가, 먼 우주를 자유로이 오가는 세계가, 누구나 '사이보그'가 될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어린 시절에 보았던 공상 과학 소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런 장치들은 물론 '미래'의 것이지만 묘하게도 '지금 여기'에서 '결여'된 것들을 상징한다. 아니, 우리가 결여라고 여겨서 감추고 바꾸고 교정하려고 드는 것들을 상징한다. 만약 과학이 발달해서 그 모든 결여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정말 '이상적인' 존재가 될까? 어떤 괴로움도 고통도 불편함도 없는 세상이 온다면 인간은 평화로워질까? 작가는 여러 편의 소설을 통해 결여에 대해, 완전한 세상에 대해, 인간의 욕망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릴리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이 도시를 만들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1년 전의 일이다."


릴리는 태어나는 아이에게 아름다움을, 아무런 병도 갖지 않고 오직 뛰어난 특성들로만 구성된 삶을 선물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종의 선행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릴리의 배아 디자인 연구는 세상을 배제의 층계로 나누었을 뿐이나, 릴리는 어느 시점까지는 자신의 일에 관해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릴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순례자들> 중)


가끔 우리의 생각은 오류에 빠진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럽지만,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것이 완전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것을 문제라고 여기는가에 대해서도 오류에 빠진다. 불편함이나 불평등, 고통, 괴로움을 기준으로 문제를 판단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사회적 지위의 하락이나 문제를 겪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으로 문제를 판별한다. 명백한 오류다. 설사 불편함이나 불평등, 고통, 괴로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문제'라고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물어야 한다. 그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의 상황과 입장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필요한 건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의식의 수정과 적절한 제도와 안전망을 갖추는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서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책을 마련하기 때문에, 일은 언제나 문제를 겪는 사람에게는 실효성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릴리는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해서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 작가는 릴리를 통해 묻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과연 알고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보게. 완벽해 보이는 딥프리징조차 실제로는 완벽한 게 아니었어. 나조차도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지. 우리는 심지어, 아직 빛의 속도에도 도달하지 못했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이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마냥 군단 말일세. 우주가 우리에게 허락해준 공간은 고작해야 웜홀 통로로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분인데도 말이야. 한순간 웜홀 통로들이 나타나고 워프 방법이 폐기된 것처럼 또다시 웜홀이 사라진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은 인류를 우주 저 밖에 남기게 될까?"(<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낡아버린 것들, 유행이 지난 것들, 뭐든 빠르게 변하고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결국 그 유행에 따라가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그건 우리가 멍청하기 때문도,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좀 더 편리한 것을 추구하고, 좀 더 능숙하고 빠른 것을 좇고, 새롭고 신기한 것에 마음을 주는 동안 세상은 변했다. 세상이 변해서 적응하기 힘든 게 아니라, 나의 바람이, 나의 욕망이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나를 다리 걸어 넘어뜨리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너무 빠르다고, 못 쫓아가겠다고, 거기 좀 멈추라고 헥헥대보지만 세상은 태연하게 답한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당신은 그걸 원한 적이 없어요. 당신이 맞나요? 증명해 보이세요.








그녀의 소설은 과학과 미래의 옷을 입고 있지만 분명하게 현재적이고 인간적이다. 인간이 잃어가고 있는 것들, 예를 들어, 사랑, 배려, 친절 같은 것들에 대해 거듭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치는 결코 완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부족하기에 사랑할 수 있고 부족하기에 배려하며 부족하기에 친절할 수 있다. 지금 사회에서 이 문장은 철저히 오독된다. 사랑하는 것 배려하는 것 친절한 것이 나약한 것으로, 힘이 없는 것으로, 가지지 못했기 때문으로 치부되고 있으니까. 반대로 어떤 친절과 배려는 '힘'이나 '가진 자의 선행'으로 해석된다. 어떤 방향이라도 결국 힘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나도 강해지기 위해 다툰다. 완전해지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작고 단절된 마을을 상상한다. 할머니는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힘도 더 많은 완벽함도 아닌, 그저 서로를 환대할 수 있는 마음이다. 나약한 나여도 괜찮다는 믿음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임을 알아내는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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