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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y 31. 2016

인간의 존엄성

모든 폭력에 대해 말하다.

"나 닮아서 그렇겠지. 그래서 이렇게 미련하게 참았겠지!"


<디어 마이 프렌즈> 6회,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장기간 폭력에 시달려 온 딸의 소식을 듣고 엄마 정아(나문희)가 눈물과 함께 내뱉은 말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건 쉽지 않다.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반복되는 폭력을 참는 건 바보여서가 아니라 그들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가정을 지키려는 이유, 가족을 지키려는 이유, 자식을 돌보려는 이유와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유년의 기억이 더해져서, 아직도 많은 가정 안에서 여성들은 울고 있다.


폭력은 그 자체로도 나쁘지만, 폭력이 주는 정신적인 충격과 상처는 더 나쁘다. 몸에 생겼던 상처가 나아도 마음에 생긴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물리력에서 오는 공포, 그 단순하고 저열한 힘에 굴복했다는 비굴함과 수치심,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짓밟는 무참함은 한 인격을 말살시킨다. 게다가 가정 폭력은 대부분 반복되고, 폭력의 특성상 그 강도는 더욱 심해지므로, 폭력을 오래 참을수록, 폭력에서 벗어나고도 오래 아파야만 한다.


극 중 폭력에 희생돼온 정아의 딸은 입양아였다. 그녀는 동생들보다 많은 나이, 입양아라는 입장 때문에 당연하게도 소극적으로 자랐다. 내가 괴롭고 힘들어도, 나 하나가 참으면 우리 가족들이 조용히 지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엄마 세대가 참으며 지내고, 그걸 다시 딸이 흡수하듯 배워서 자신의 삶 마저 엄마와 비슷하게 만드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공공연하게, 개인이 가진 성품이나 사회적 조건을 이용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는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의 존엄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훈련과도 같다. 아주 잔인한 일이다. 그것이 어린 나이에 행해질수록 자신의 존엄이나 가치를 지키기보다는 쉽게 포기해버리는 인간으로 자랄 확률이 높다. 인간은, 아주 사소한 습관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다.


그녀에게는 성추행을 당했던 유년의 기억도, 다시 그 문제를 핑계 삼아 협박과 폭력을 일삼는 현재의 남편도, 동일한 불행의 반복으로 느껴진다. 그녀는 폭력 사실을 알고 찾아온 엄마에게 "이제 내 인생도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다." 고 말한다. 폭력에서 벗어나는 그 자체가 '해방'이라는 말로 그녀는 그간의 고통을 대신 설명한다. 시끄러운 이혼 소송이나 위자료보다도 내 영혼의 고요가 더욱 절실하다는 말이다. '저런 놈은 가만 두면 안되지!' 는 타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녀가 폭력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를 일으켜세울 시간이 필요하다.


드라마를 보며 내내 울었다. 한 인간의 삶이란, 어쩜 이렇게도 질기고 모진 것인가. 그녀가 가진 불행은 왜 남들보다 더 많고 큰 것인가. 폭력에 희생 당한 그녀의 얼굴, 그걸 지켜보는 엄마의 얼굴이 교차될수록 내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용서, 해야하는가. 용서, 할 수 있는가?






같은 날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18년 전, 한 소년이 겪은 충격적인 폭력 사건을 다뤘다. 소년은 교회 목사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미국 교회에서 소개받은 신학대 학생의 집에서 여름 방학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소년은 두 달 동안 끔찍한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고문에 가까운 폭력, 심지어 동성에 의한 성폭력까지 당한 소년. 그는 18년 만에, 진실을 밝히고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 나섰다.


15살 어린 소년에서 지금은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그는, 자신의 아들 앞에서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진실을 밝히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가해자 중 한 명은 사건 당시에 미국 경찰에 의해 기소된 상황에서 보석금을 내고 도주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 나라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다. 또 한 명은 우리 나라에서 버젓이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취재진이 찾아가자 "당신 같으면 처벌 받으러 제 발로 찾아가겠느냐. 그 목사도 잘 사는데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 고 항변한다. 마지막 한 명은 가해자 세 명 중 유일하게 불기소 처분을 받은 자로, 현재 '목사'의 동생으로 미국에 살고 있었는데, 피해자가 찾아가자 "그걸 그렇게 기억하니? 우리가 너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려고 애쓰긴 했지. 다 잊고 각자 자리에서 잘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 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피해자의 떨리는 손을 잡고서 말이다.


두 달 동안 왜 한 번도 도망칠 생각을 못했냐고 제작진이 물었을 때, 그는 말했다. 그들이 "너가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함께 유학 온 누나가 꿈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지내라" 고 말했다는 것이다. 머나먼 타국 땅에 어린 남매 단둘이 유학을 떠나온 상황과 가족을 생각하는 소년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 협박. 용서할 수 있나?, 용서해야 하나?






나는 이 사회에서의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무거운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섣부른 판단이나 추측, 심지어 피해자가 아무 원인도 제공하지 않았는데 때렸겠느냐는 억측(이런 것도 말이라고 하는가?), 건방진 이해나 강요는 더 큰 상처만 줄 뿐이다. 약자가 겪는 폭행 사건의 대부분은 신고를 하지 않으려는 수치심이나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더 음지로 숨는다. 순영이의 남편은 장인어른을 때리며 말했다. "니 딸, 자해중독 있잖아! 그걸로 몰아가면 그 뿐이야!"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괴로움 때문에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조차도 흠이 되고 약점이 된다. 잔인한 세상이다. '목사'는 말했다. "나는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일로 자꾸 문제를 만들면 무고죄와 명예훼손으로 법적인 대응을 하겠다." 고. 고통은, 고스란히 피해자만의 것이 되었다.


악랄하고 교활한 게, 강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과연, 악랄하고 교활한 것이 강하지 않은가? 폭력은 현재 진행형이며, 더 잔인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폭력 앞에 맞서는 건, 더 악랄하고 교활해지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폭력을 부끄럽게 만드는 세상, 그 치졸하고 비루한 존재가 판칠 수 없도록 폭력을 한심해하는 정서만이 정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피해자가 숨지 않도록, 모두가 가해자를 손가락질하고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법적인 처벌은 물론이다. 저것 보라고, 저 한심한 인간이 스스로의 감정 조차 어쩌지 못해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썼다고. 맞은 이가 바보인 게 아니라 저 인간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약함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야, 약하게 태어난 대부분의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났을 때, 파리 시민들은 빠르게 '일상' 으로 돌아갔다. 겁먹거나 숨지 않고, 다시 거리로 나와 노래 부르고,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들이 보여준 건 폭력 앞에 주눅들지 않겠다는 의지, 폭력의 강압적인 공포 때문에 고귀한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할 때,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행해지는 모든 폭력은 사라질 것이다. 또한 나 대신 그 사람이 겪은 것 뿐이라는 공감만이 사회를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진정으로, 강하고 섬세한 감성을 나누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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