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 웨인, <아파트먼트>
*소설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나는 내 방 벽장에서 오랫동안 쓰지 않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왔다. "우리가 글 쓰고 있는 거, 사진으로 한 장 찍자." 내가 말했다. "빛이 지금 딱 좋아."
"왜?"
"증거로 남겨놔야지," 내가 말했다. "우리의 덧없는 청춘을. 언젠가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나는 아직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지만(물론 내 체감으로는 무척 오래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도 있다.) 만약 나에게 다시 20대로 돌아갈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나의 20대는, 그러니까, 그 시절을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물론 청춘이지만), 청춘은 김연수의 말처럼 '상실의 과정'인 것이 맞다. (대체 누가 청춘이 아름답기만 한 것처럼 말했나! 거짓말쟁이!) 나는 그때 매일의 '나'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보듯 바라봐야만 했다. 어떻게 해도 사라지는 나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 심지어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와 내가 나 라는 사실까지도 - 불분명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럽게 모든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 그게 사람이든 사상이든 책이든 - 에 나는 매료되었고, 또 쉽게 매료된 만큼 쉽게 실망했다. 나는 한동안 그 모든 방황들이 오로지 내가 가진 조건들 때문에 나만 겪어야 하는 불공평한 감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건 내가 청춘이었다는 분명한 증거였음을. 나의 다른 조건 때문이 아니라, 내가 청춘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음을. 그리고 그 시간은 이미 지났음을.
다시, 나는 아직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그러지 마" "하지마" "안 돼" 였다. 소설을 읽는 중간 중간 나는 마치 노인처럼 "끙"하는 소리를 내며 속으로는 저런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날 무렵, 주인공이 스스로 자백하는 것처럼, "나는 도둑이 든 것처럼 꾸미지 말았어야 했다. 빌리의 원고를 지우지 말았어야 했고, 그 결혼식 여행을 가지 말았어야 했고, 애초에 함께 들어와 살자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 .(중략). . . 나는 그를 감탄스러운 작품을 썼던, 잠깐 동안 알았던 동료 수강생으로 희미하게 기억했을 테고, 그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모든 후회를 그들의 첫 만남부터 어렵지 않게 예상했다. 내 안에 경고음이 울렸다. "위험해" 그러니까 나에게 남은 건, 그들이 '어떻게' 부서질지의 문제였다고 해야할까. 나에게 예지력이라도 생긴 거라면 우선 인생역전부터 했을테니, 그런 건 아니고. 그건 순전히 청춘의 시간을 통과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시간을 통과했다는 증명서 같은 것. 나는 그 시간들이 대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내 청춘의 기억들이 제각기 그 몸을 펴서 기지개를 켜는 걸 지켜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은 그들이 문학을 사랑하고 불멸의 작가를 꿈꾼다는 것이다. 빌리와 화자인 '나' 역시, 과연 자신에게 '천재적인' 혹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가로 스스로를 시험한다. 묻고 또 묻는다. 쓰고 또 쓴다. 하지만 또 이 천재적인 재능이란 건 스스로가 알아채거나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문학이란 내가 쓰고 결국 타인이 알아봐줘야 하는 것이니, 그들은 끊임 없이 타인이 그 재능을 알아봐주기를 갈구한다. "저에게 천재적인 재능이 있나요?" 그 질문은 곧, 제가 계속 써도 되나요, 이 불투명한 길에 제가 완전히 투신해도 되나요, 와도 동의어로 들린다. 그들에게 재능은 곧 미래이고 희망이며, 망망대해 위의 구명보트인 셈이다. (물론 구명보트가 있어도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지만) 그래도, 만약 그런 게 나에게 주어진다면. 제발 그렇게만 돼준다면.
그러니 그들에게 합평은 어쩌면 나의 재능을 검증해볼 수 있는 시간이리라. 나는 예술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창작 수업이나 합평을 경험해본 적도 없지만 내가 속한 학회에서 세미나는 꽤 오래 경험했었다. 학회에서는 커리큘럼을 정하고 그 커리큘럼에 맞춰 각자 책을 읽고 자료를 준비해와서 의견을 나눴다. 그런데 세미나는 대부분의 경우, 같은 책을 읽고 좀 더 나은 논리를 구축해나가는 공통의 목표를 함께 달성하는 느낌이어서 서로의 의견을 공격하거나, 상대의 의견에 칼날을 들이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딱 한 번, 한 선배가 내가 쓴 단어를 비웃은 적이 있는데, 그때 받은 상처가 지금도 또렷하다. 세미나에 참석한 동기, 후배, 선배들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너 그걸 몰라?"하며 박장대소하던 선배의 얼굴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당황했다. 다행히, 아무도 그 선배를 따라 웃지 않았고, 그 분위기에 얼른 자기 태도를 교정하던 선배의 표정이 기억난다.
만약 그때,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공격할 수 있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부족하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일일텐데. 그걸로 모두가 나에게 몰매를 때리는 일을 상상하면 나는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런 걸 이길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다. 나는 합평이라는 문화를 알게 된 후로, 그 시간을 딛고 일어서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창작에 대해 따로 배우고 경험해온 사람들에게도 늘 궁금한 것이다. 합평을 통해 받은 따끔한 비판들이 정말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느냐고. 당신 마음 속의 어린 예술가가 쑥쑥 자랐느냐고.
김영하는 그의 에세이에서 자신이 한 예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일화를 소개하며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은 딱 하나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재능을 지켜낼 것, 그리고 어서 이 학교를 무사히 졸업해서 떠날 것." 날카롭고 예민한, 동시에 변덕스럽고 시샘많은 동료(이자 경쟁자)들 사이에서, 이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합평'이라는 이유로 상대의 글을 조각조각 잘라서 분석하고 '몰매'를 때리는 일을 견디는 것은 차라리 통과의례 같은 거라고. 견뎌내고 이겨내야만 하는 어떤 것. 그것을 '통해서' 예술가가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과'해야만 나의 작은 예술가를 지켜낼 수 있다고.
나도 마치 이 소설의 화자처럼 말해보고 싶다. 나는 그들의 결론을 알고 있으니, 가정법으로. 만약 두 주인공 역시, 합평 시간에 누군가는 비난을 받았고, 누군가는 추앙을 받은 채로, 그러니까, 한 명은 위축된 채로, 다른 한 명은 확장된 채로 만나지 않았다면. 한 명은 윤택하고 모자람 없는 환경에서, 다른 한 명은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런데도 둘 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년 시절의 공통된 불행이 없었다면. 한 명은 잘 생겼고 다른 한 명은 평범하지 않았다면. 한 명은 보수적이고 다른 한 명은 덜 보수적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부서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두 사람의 청춘의 조각은 시련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을까.
이쯤되면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은 아주 외롭고 또 찌질하고, 서툴고 부족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공평하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별로다. 보통이고 평범하다. 그런 그들이 통과하는 청춘의 시간 역시 2021년의 내가 공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친근하다. 그건 아마 그들과 내가 '청춘'이라는 단어로 한 데 묶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내가 청춘을 통과한 시기가 그들이 살았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다는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90년대가 지닌 "노스탤지어를 품은 채" 작가는 질투와 애증, 경외와 거부감, 다름과 틀림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 거리를 조절할 줄도, 미리 조심할 줄도, 덜 좋아하거나 덜 싫어할 줄을 모르는 청춘의 우리들을 소환한다. 우리는 모두 그런 시간을 겪으며 나이 먹어 가니까. 그건 '그때의 나'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없이, 그 모든 시간 속의 나의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이니까. 화자가 끝내 빌리가 합평에서 써 준 의견들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는 것처럼.
결국 두 사람의 우정이 박살나자, 내 안에서 끈질기게 들리던 목소리, 둘이 함께 살지 말라고,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너무 가까워지지 말라고, 너무 감탄하지 말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뭐지. 나는 갑자기 불쾌한 기분이 되었는데, 내가 마치 누군가의 빛나는 청춘을 시샘하는, 추악하고 늙은 마녀라도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불행해질 것을 안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진 것도 아니면서. 나는 단지 조금 먼저 겪었을 뿐이면서. 구식 컴퓨터를 가끔 '디스크 조각 모음' 해줘야 하듯이 나 역시 내가 걸어온 시간에 남아 있는 '나'라는 조각들을 그저 주워담고 있을 뿐이면서. 꼭 내가 다시는 놀라지 않고 다시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라도 할 것처럼, 아니, 놀랄 일도 함정이 될 만한 일도 결코 겪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나는 두 사람의 우정을 훼방 놓고만 있었구나.
문득 상실로 가득했던, 매일의 나를 잃어버리는 듯했던 내 청춘의 시간이 나에게는 아직도 다 맞춰지지 않은 퍼즐 조각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 여기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시간에게 제자리를 찾아주지 못한 것 같은 기분. 며칠 동안 잠을 설치고 뒤척이면서 나를 불편하게 했던 기분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그 생각의 귀퉁이 마다 어떤 얼굴이, 어떤 감정이, 어떤 상처가 손을 내밀었다. 나 역시, 열지 않았다면 좋았을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이 있다.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누군가를 만났던 적이 있다. 좋아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무엇을 좋아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그 문은 부서진 채로, 우리는 헤어진 채로, 좋아하던 그것은 시들해진 채로 내 안에 있다.
이미 다 지나버린 일들을 두고도 이토록 생생하게 어떤 감정들을 느낄 때마다 생각한다. 우리의 경험은 단선적이지 않다고. 우리는 무언가를 겪을 당시에 한 번, 그것을 다시 떠올리고 해석하면서 또 한 번 겪는다. (당연히 여러 번 떠오르는 어떤 일은 여러 번 겪는다.) 그럴 때 나는 시간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시간이 닦아 놓은 부드러운 길을 걸으며 다시 경험하는 그 일들은 나에게 좀 더 나은 일로 해석된다. 내가 그 일에 새 옷을 입혀줄 여유가 생긴 것이다. 과거의 내게 좀 더 부드러운 길을 내어줄 수 있는 내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 청춘의 시간은, 또 그때의 어떤 기억들은 그 부드러운 길을 걷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다. 자기를 바꾸지 말라고, 네가 겪었던 그 순간을 잊지 말라고 나를 붙잡는다. 왜 일까. 왜 나는 저 기억들을 끝내 이 부드럽고 괜찮아 보이는 길에 들여놓지 못하나.
뒤척이면서, 오래 걸으면서, 어쩌면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다 잊고 그 기억들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길을 걸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보다는, 매번 부끄럽고 창피해도 기억하고 돌아보면서, 이번에는 그것과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 건 아닐까. 이 불편함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심지어 이렇게 노력해도 자꾸 잊혀진다. 부끄럽고 창피했던 기억이 처음 그대로인 건 아니다. 시간은 기억 위에 자꾸 흔적을 남기고, 예쁜 옷을 선물하니까. 가끔은 부끄러움과 창피함마저도 익숙해져버리니까. 어쩌면 나는 다 잊혀질까봐, 아픔에도 익숙해질까봐 겁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부디 부끄럽고 창피해하는 걸로 만족하지 않기를. 다른 선택을 하기를. '그럴 수도 있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일을 매번 미룬다. 그럴 수 있는 때는 이번에도 오지 않았다. 다음에도 오지 않을 거다.
그러니 이 어중간한, 미적으로 전혀 아름답지 못한 삐뚤빼뚤한 기억의 모양은 모두 나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그러므로 모두가 제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기억을 걸을 때마다 발치에 걸리는 그 위치에, 도저히 모른 체 할 수 없는 그 모양으로, 만져질듯 실감나는 그 상태로 그것들은 그래야만 해서 그렇게 내 안에 살아 가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리뷰를 다 써가는 와중에, 나는 비로소 나에게, 소설 속 인물들에게 말한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길 잘했노라고, 그를 만나기를 잘했고, 그것을 좋아하길 잘했다고. 끝날 듯 끝나지 않던 디스크 조각 모음도 결국엔 끝이 나듯이, 내 안의 조각들도 하나씩 나에게 모여 들기를. 그리하여 나의 생이 다 하는 날에는, 부디 가장 멀리 흩어져 있던 조각까지도 내 안에 돌아와주기를. 내 청춘의 시간에서 돌아온 또 한 조각의 나를 오래 바라보며,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침해할 권리가 없으니, 그 생긴 모양 그대로, 거기에 맞춤한 자리를 내어 준다. 그리고 속삭인다. 나, "아직 여기 있어."
덧. "90년대는 아마도 미국의 보수적인 지역 출신인 누군가가 컬럼비아대학 MFA 프로그램에 그럴듯하게 속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두 개의 미국에서 온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였을 것"이라던 작가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한다. 옮긴이가 덧붙였듯이, 지금은, 글쎄. 우선 둘이 만나기조차 어렵고, 혹여 아주 드문 경우로 만났다 해도 둘은 친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건 여기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