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케르테스, <ON READING>
최초의 '읽음'의 기억을 따라가본다. (기억이 아닌 상상에 가깝지만) 벽에 붙은 ㄱㄴㄷㄹ이 차곡차곡 새겨진 포스터를 글자 한 획보다도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읽기 시작하던 날이 있었겠지. 자음 다음에는 모음을 배워 읽었을 거고, 차차 단어라는 걸 만들어 읽었겠지. 그때 나에게는 세상이 온통 '읽을 것' 투성이였을거다. 거리의 간판도 벽에 그려진 낙서도, 버스와 지하철에도 온통 내가 읽어내야 할 것들로 가득해서 나는 두리번거리며 더듬거리며 그 모든 읽을 것들을 바싹 마른 솜에 물을 조금 부었을 때처럼 흡수했을거다. 그러다 제법 글이 말을 따라잡기 시작했을거고. 세상이 온통 읽을 것 투성이던 행복한 호기심의 시절은 금새 끝나고 나는 더이상 읽는 일에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됐겠지. 그냥 읽어지는 글자들, 뜻을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글자들 속에서 '지겨워서' 하품이 나왔을거야. 뭔가를 조금 알게 되면 호기심은 급격히 줄어드니까. 거기서 좀 더 알려고 해야 다시 궁금해질텐데. 보통은 '안다'고 믿은 채로 하품을 하게 되니까. 나는 문장을 읽을 줄 알고, 문단을 읽을 줄 알고, 다시, 한 편의 글을,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을거다.
내가 글자라는 걸 배운 후로 내 눈으로 읽은 글자들을 모두 모으면 몇 글자가 될까. 내가 처음 읽은 책은 뭐였을까. 가장 많이 읽은 글자와 가장 적게 읽은 글자는 뭘까. 나는 무엇을 읽었을 때 웃었고, 무엇을 읽었을 때 울었나. 나는 어디에서 가장 오래 글을 읽었을까. 아마 고등학교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밤 12시까지 열려있던 그 도서관에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종이 위에 인쇄된 무언가를 읽던 나. 아침 7시에 등교해서 밤 12시까지,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모두 뺀다고 해도 24시간 중에 15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나. 가끔 도서관 서가를 오가며 아무 책이나 마음에 드는 책을 뽑아 잠깐 눈을 쉬기도 했는데. '읽어야 할 것'들에 지친 나는 '읽든 안 읽든 상관없는 것'을 읽으며 쉬었다. 으이그, 재미없는 청소년같으니.
가장 짧은 읽기는 언제였고, 어디서였을까. 깨닫기 좋아하는 나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오래 머금고 허공을 보며 다시 그 문장을 곱씹는 걸 좋아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가장 오래 좋아한 글귀는 뭐였을까. 나는 언제 가장 절실하게 읽고 싶었나. 언제 가장 절박하게 읽었나. 언제 가장 즐겁게 읽었고, 언제 가장 힘겹게 읽었나. 읽기 싫었던 때는 언제였고, 어쩔 수 없이 읽었던 때는 언제였나. 읽어서 흐뭇했던 적은 언제이고, 읽어서 원망스러웠던 적은 언제였나. 읽지 않고 보지 않았던 적은 없었나? 마음의 문도 눈도 모두 닫았던 적은?
앙드레 케르테스의 사진집 <ON READING>을 보았고, 읽었다. 제목처럼 온갖 장소에서 온갖 것들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그의 사진들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들은 길 한 가운데에서 읽고, 지붕 위에 앉아서 읽고, 침대 위에서 꿈꾸듯 읽는다. 어린 이도, 나이든 여자도, 더 나이든 남자도,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도, 분주해보이는 사람도, 한가해보이는 사람도 뭔가를 읽고 있다.
주변은 모두 잊은 듯 보이는 그들의 '읽기'를 나 역시 다시 읽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들이 종이를 쥐고 있는 손의 모양과 종이를 바라보기 위해 취한 자세를 보면 곧 그 얼굴이 상상된다. 그건 완전히 몰두해버린 얼굴, 지금 시선이 머문 종이 속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한 얼굴이다. 그래서일까, 길에 엎드리다시피한 사람도, 아슬아슬하게 책을 들고 있는 사람도, 내 눈에는 모두 고요하게 보인다. 그들은 그 고요 속에 있고, 작가는 그 찰나를 포착해 사진에 담았다. 그들은 그 '읽기'의 행위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몰입의 순간 같은 것들.
그 고요의 순간 앞에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고 어떤 이유도 필요 없다. 그들이 보여주는 건 완전한 읽기의 순간, On Reading. 이 좋은 걸, 그러니까,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시에 가장 전복적이고 과감한 이 일을, 나는 왜 그만뒀었지?
실제로 나는 여러 번, 읽기에서 도망쳤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때의 나에게는 읽는 일이 '사치스러웠다'. 그 고요에 닿기도 전에 나는 도망쳐야 했다. 그 고요 속으로 빠져들 자신도, 그 고요 속에서 나의 민낯을 볼 용기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핑계야 아주 많았다. 나는 바빴고 고됐고, 괴로웠고 슬펐으니까. 나에게는 책을 들고 앉아서 나를 뒤바꾸는 시간으로 뛰어들 힘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으니까. 언제나 읽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많아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글귀 하나였던가, 문장 한 줄이었던가에 나는 그만 모두 잊고 고요해졌다. 먹은 마음도 없이 불쑥 찾아온 그 순간 이후로 나는 다시 읽는다. 읽는 일이 좋다. 떠났다 돌아오니 더 좋다. 어쩌면 가장 무해하고 가장 유용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읽기가 주는 고요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달라고, 고요의 찰나를 잇고 또 이어서 나는 평화롭고 싶다고. 나는 읽기에 빠져든다. 어디서든 읽고 싶고 언제나 읽고 싶다. 아주 고맙게도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읽을 것들이 있어서 내가 읽으려고 하자 매번 나를 위로하는 말이, 나를 이해하는 말이, 나 대신 화를 내주는 말이 나타났다. 꼭 어릴 때처럼, 처음 단어를 배웠을 때처럼, 다시, 세상은 내게 읽을 것들 투성이가 되었다. 어디든 읽을 것들이 나타난다. 마치 새로 보는 세상처럼 궁금하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또 있다. 읽을 때 나는 가장 사치스럽다. 재미없는 건 읽지 않는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건 읽지 않는다. 흥미로워서 시작한 책도 언제든 멈춰서서 그만둔다. 좋아서 다가가놓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몇 달 뒤에 다시 꺼내서 읽어볼지언정 오늘 '아니'라면 아니다. (놀랍게도 손에서 놓을 수 없이 좋은 것만 읽기에도 늘 시간이 부족하다.) 말하자면 읽기의 시간은 내가 나에게 허락한, 나의 감정과 감각에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 '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벗어나 '하고 싶다'로 가득한 시간. 그뿐인가. 책은 그냥 예뻐서도 사고 안 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산다. '쓸모'와 '효용'은 넣어둔다. 가끔은 꽂아두고 그저 바라보기 위해서도 사는데 그 책은 실제로 꽂아두고 바라보기만 한다. (물론 아주 작은 확률이긴 하지만 그 책들 역시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
나에게 읽기는 내 슬픔을 위로하는 시간이면서, 내가 가장 자유롭고 해방되는 시간이다. 나는 읽으면서 점점 깨어나고, 읽고 나면 조금 나은 내가 된다. 읽고 나면 내가 위로받고 괜찮아진다. 만 갈래로 흩어졌던 마음이 어떤 구절을 만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글로 낫는다. 그래서 때로는 꼭 신세지는 기분이 든다. 너무 많이 받았다고 느낀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내 안의 많은 것을 뒤바꿔버리는 읽기의 순간. 돌아서면 방금 읽은 것들이 금새 사라져버리는데도, 끝내 내 안에 지울 수 없는 뭔가를 남기는 읽기의 순간. '안다'고 믿어서 하품하는 게 아니라 '더 알고 싶어서' 눈을 반짝이는 순간. '나' 정도쯤은 가뿐히 넘어서는 순간.
돌고돌아 다시, '나'조차 완전히 잊은 채 뭔가를 읽고 있는 그들을 본다. 그들의 얼굴과 손, 자세에서 '나'조차 사라진 고요가 보인다. 읽고 있는 그것과 하나가 된 듯한, 동시에 그것을 완전하게 '읽고' 있는 그들을 본다. 읽고 있는 그 모습들이 아름다워서, 나는 또 위로를 받는다. 내 모습도 저렇게 아름답기를 바라면서, 나는 오늘도 읽는다.
덧. 이 사진집을 선물해주신 이미 좋은 벗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