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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Nov 18. 2021

전혀 실례가 아닙니다.

이수은,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에서 고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 . .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 .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 하지 않는 책이다."


독서를 양으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다시 말해 독서량이라는 말 자체가 실은 무의미한 단어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세상에는 좋은 책이 너무나 많고,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좋은 책이 인쇄되어 나오고 있고, 지금으로부터 수 십 년에서 때로는 수 백년 전의 책마저도 매번 새 옷을 입고 인쇄되어 나오는, 말하자면 독서의 바다란 화수분 같은 것. 퍼내도 퍼내도 계속 나오는 것이어서 힘껏 읽고 소화하는 와중에도 늘 허기짐을 느낀다. 돌아서면 내가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이 줄을 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 홀로 독서는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생각을 고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마음을 놓고 허겁지겁 하지 않기란 얼마나 요원한지. 하루는 이 선물같은 일에 고맙다가 하루는 내 부족함을 느끼며 허탈해하기를 무한히 반복한다.


그리고 그 대열에, '고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줄도 있다. 또 '벽돌책' 줄도 있고, '어려운 책' 줄도 있다. 여기 서 있는 책들은 뭐랄까, 일단 들고 있으면 왠지 내가 좀 격이 있어진 것 같고, 책 제목만으로 나를 쉽게 판단하려는 시도에서도 자유로워진 것 같으면서, 사실 며칠 째 같은 페이지를 맴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며칠 째 그 책을 꼭 들고 밖을 나서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작가의 이름은 '나도 안다'고 말해야 할 것 같고, 그 이름이 나에게 한꺼풀 멋짐의 장막을 씌워줄 것 같은 그런. 물론 그 이름조차 어딘가 흔하지 않고 약간 복잡하고 발음하기 까다로워야 한다.


그런 책들은 때로 권위를 넘어 권력을 느끼게 한다. 가끔은 그 책들이 그것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을 나누고, 읽지 않은 다수에게 다소간의 '자신 없음'을 선물한다. 용기에 용기를 내어 막상 읽을 때는 또 어떤가. '내가 이렇게 느껴도 되나?' '이게 이런 뜻이 맞나?'라며 나의 감각을 통제한다. 움츠러든다. 책과 함께 웃고 떠들고 울고 떼써야 하는데, 그게 독서인데, 나는 마치 그 책의 권위에 무릎 꿇은 기분이 된다. 그 책은 선생이 되고 나는 한참 모자란 학생이 된다. '나는 아직 멀었어.'


그럴 때 나는 반항하는 마음이 된다. 그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권력을 가지려는 시도가 아니냐고. 고전이 꼭 모두에게 의미와 가치가 있는 건 아니라고. 오히려 그렇게 이름 붙이는 일이 책과 독자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독서는 어디까지나 즐거울 것!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이렇게 혼자 되뇌이면서도, 나는 또 혼자 생각한다. 읽어보지 않고 말하는 일에 대해서. 어쩌면 그건 나의 의견이면서 나의 의견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책들을 직접 읽어야만, 내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읽어야만 나는 그것에 '대한' 나의 뭔가를 얻을 것이므로.


나는 독서는 어디까지나 즐거울 것이라는 나의 원칙에 충실한 채로, 그저 내가 읽은 것들에 대해서 말할 뿐. 쓰다 보니 고전도 그저 하나의 책이고 이야기이고 누군가가 공들여 담아낸 자기 안의 소우주일 뿐이었다. 아, 역시, 그 책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놈의 분류가 줄세우기가 언제나 문제였다. 그러니 마치, 모든 고전을 고전으로 뭉뚱그리는 것이 차라리 그 낱낱의 책들에게 미안한 일이라는듯이, 나는 그 책들 마저도 그저 어떤 한 권의 책을 만날 때처럼, 자유롭고, 그리하여 충분히 즐겁기를 바라게 된다. 그 뿐. 그렇게 그 책들을 만나는 날을 기다릴 뿐.




자못 복잡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런 복잡함은 이수은의 책을 설명하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나의 넋두리일 뿐. 이수은의 책은 가볍고 경쾌하다. 짧은 호흡, 재치 있는 문장, 깊은 통찰(그러니까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책 한 권에 다 담았는지!). 게다가 그녀의 마딘 독서 목록까지. 어떤 책에 손이 잘 가지 않는 이유는, 대체 이 책을 언제 읽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인데, 그녀의 책을 펼치면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다정한 손길을 건넨다.


그녀는 '통장 잔고가 바닥일 때' 읽는 책, '직장을 관두고 싶을 때' 읽는 책이라고 안내하면서 거기에 고전이니 벽돌책이니 어려운 책의 목록을 기꺼이 펼친다. 그뿐인가. '싸우러 가기 전에', '연애에 실패했을 때'처럼 누구에게나 있을 삶의 한 순간을 그 책들과 능청스럽게 연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 상황별로 빠짐 없는 그녀의 추천 도서 목록을 보고 있자니, 그놈의 벽돌책들을 언제 다 읽어, 어휴, 그냥 내 현실을 열심히 살겠노라고 두 손 들고 마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될 것만 같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웃는 그녀. 대신 따끔따끔한 촌철살인의 통찰을 들려주며 '그래서 그 책이 뭐였다고?' 궁금하게 만든다. 가령 이런 것들,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힘듭니다'편에서 돈키호테를 설명하며 그녀는 말한다. "아웃사이더는 본질적으로 자발적 아웃사이더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아웃사이더라면, 혹시 자신이 왕따 피해자는 아닌지 정신 차리고 살펴봐야 한다. 그게 아니고, 자기는 마이웨이로 살면서 남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과욕임을 성찰하자. 못하는 건 인정하고, 잘하려고 애쓸 마음이 없다면 그에 따른 손해는 감수해야지."  


'금요일인데 약속이 없어서'편에서는 어떤가. 그 허탈하고 외로운 시간에 뜬금 없이 인류의 종말을 상상하자는 그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디자인한 종말에는 피치 못할 '인간적 결함'이 있다. 유사 이래 세상에는 천재가 이해할 수 없는 아둔하고 뒤떨어진 인간들이 늘 존재해 왔다. 그들은 과학과 문명의 진보에 역행하여 제 손으로 직접 땅을 파고 열매를 주워 먹고 산다. 극강의 쾌감을 선사하는 기적의 알약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추레한 육신이 허락하는 만큼만 가련하게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겠노라는 못난이들. (중략) 그래서 그들 중 일부가 살아남는다. 각자, 뿔뿔이 흩어진 채, 서로 다른 곳에서."


'남 욕이 하고 싶을 때'편에서 그녀는 개츠비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처지에 있는 누군가가 혼신의 노력으로 '그래도 계속해 보겠다'고 말할 때, 나는 그를 냉소하거나 회의하거나 수수방관하지 않고, 그의 전력투구를 진심으로 응원해 줄 마음의 힘을 가졌을까."


그리고 그녀가 이 책에서 소개한 그 많은 불후의 명작들 속에서도 가장 애정해 마지 않는 (2018년 노벨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거봐, 이름 어렵다니까)의 <방랑자들>에 덧붙이는 말은 뭉클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 종이지만 서로는 각자 다른 개인이다. 그러니 비범한 에너지를 가진 어떤 사람을 보았다면 세상의 잣대로 왈가왈부하지 말고 내버려 두자. 그러면 그들은 자기 속에서 빙하처럼 차고 자작나무 숲처럼 청량한 공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 가령 토카르추크 같은 사람이 노벨상을 받으면, 그가 뿜어내는 상쾌한 날숨은 욕망으로 부글대는 세상의 열기를 식혀 줄 것이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걷는 일도 좋아한다. 두 가지 일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비슷한 일이기도 하다. 책이든 길이든 한 번에 전부를 읽거나 걸을 수는 없다는 점, 언제나 아주 작은 단위(글자 한 자, 발걸음 한 발)부터 시작한다는 점, 처음엔 별로였는데 다 읽거나 걷고 나면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그렇다.


, '상상'만으로는 얻을  있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독서나 산책은 오로지 읽음으로써, 걸음으로써 완결된다.  행위 모두 단순히 읽고 걷는  외에는 나에게  이상의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읽지 않거나 걷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책이 좋았다. 그녀의 글도 좋고 사유도 좋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안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질문은 바로 이거였기 때문. ' 책이 뭐였더라?'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책을 정말 좋아하는가보다. 그래서 이토록 담백하고 유쾌한, 기어이 '책'이 주인공인 책을 써낼 수 있었구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 기록은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때로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따뜻함을 전한다. 게다가 나도 좋아하는 것을, 나보다 먼저 나보다 오래 좋아한 사람에게는 내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들이 주는 경외감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전혀 실례가 아니었다. 오히려 친절한 안내서였고, 먼저 겪어본 언니가 말해주는 알짜배기 설명서였다. 언니들은 거짓말을 잘 안하지. 암.



덧. 책을 소개하는 책을 소개하는 내 글은 대체 몇 차 저작물일까? 생각하려니 어지럽다. 나는 산수를 잘 못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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