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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Nov 25. 2021

당신의 일상은 안녕한가요.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사생활의 천재들> 리뷰를 하기 전에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사적인 이야기 이므로 읽고 싶지 않다면 건너 뛰어도 좋다.


첫 번째.

나는 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한 작가의 책은 한 권만 리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이렇게까지 아둔하다. 나의 아둔함을 굳이 변명하자면, 내 나름의 생각은 이랬다. 어떤 작가의 책을 여러 권 리뷰하는 것은 동어 반복이 될 확률이 크며(네 능력의 한계로?), 나는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책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므로(좋아하는 것만 읽으면서?) 가급적 이 원칙을 지키자고 생각했다. 물론 이 원칙은 깨진 줄도 모르고 깨졌는데, 정혜윤 작가의 <앞으로 올 사랑>을 리뷰할 때, 이미 <뜻밖의 좋은 일>을 리뷰한 후였다. 그래, 팬데믹이잖아. 이 고난의 시간을 헤쳐갈 수 있게 희망의 책을 소개하자며 고민도 없이 리뷰를 해버렸는데, 일 년(도 안돼서) 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리뷰하며 내 원칙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가 되었다. 존 버거, 마쓰이에 마사시, 김진영의 책은 두 권씩 리뷰했고, 다른 작가들이 그보다 못해서 리뷰를 안 한 건 아니다. 갑자기 정신이 드는 순간에는 한 작가의 한 작품만, 이라는 원칙을 가까스로 지키다가 정신을 잃은 순간에는 다시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리뷰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두 번째.

이건 이 책과 조금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릴 때부터 꿈이 많았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그럴테지만, 병원에 가면 의사나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미스코리아도 빠지지 않았고, 스튜어디스나 과학자, 대통령이나 스나이퍼도 되고 싶었다. 스나이퍼에서 약간 멈칫 하셨을 분들을 위해(아니라고?) 조금 부연하자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극장에서 보고 극 중 저격수를 연기한 배우(배리 페퍼)가 어찌나 강심장이고, 또 정말 위급할 때마다 그의 총솜씨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는 게 어찌나 멋있는지! 지금도 놀이 공원에서 장난감 총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런 증상은 영화 <암살>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심각해졌는데, 짐작하다시피 극 중 안옥윤은 명사수가 아닌가. 눈이 안 좋은 그녀가 깨진 안경을 쓰고, "기관총만 잡고요."라고 할 때 심쿵 안 한 사람이 어디있나. 나도 눈이 안 좋지만 안경을 쓴다면 얼마든지 저격수를 할 수 있겠구나. 기관총만 잡고 간다. 이런 식이 돼버리고 만다.


그래서일까. 나는 직업인의 하루가, 혹은 직업인의 몸짓이 언제나 궁금하다. 어릴 때 병원에 가면 간호사 언니들의 몸짓을 유심히 지켜보며 집에 와서 따라해보고는 했다. 내가 어릴 때는 지금처럼 의약분업이 되어 있지도 않았고, 조제가 자동화되어 있지도 않아서 처방된 약은 모두 조제실에서 간호사 언니들이 조제했고, 만약 가루약이 처방되면 작은 돌절구에 약을 직접 빻아서 약수저로 일일이 종이 위에 그걸 분배하고, 그 종이를 기가 막히게 빠른 손 놀림으로 착착 접어서 편지 모양을 만들어서 종이봉투에 담아줬었다. 아쉽게도, 조제실은 갈색 유리로 막혀 있고, 약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반달 모양의 작은 출입구만 내어둔 곳이 많아서, 나는 까치발로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보며 간호사언니들의 손놈림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학습 환경이 좋지 못했던 거지. 휴. 게다가 잘 아프지도 않아서 한 번 병원에 가면 기회를 틈 타 열심히 배워야 했다. 집에 돌아오면 못 쓰는 종이를 구해서 색종이 보다 약간 작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자르고 어디선가 정체불명의 가루를 구해와서 티스푼으로 나눠 담고 종이를 신나게 접었다. 그다음은 하이라이트. "이상희 님, 약 받아 가세요!"라고 소리치기. 캬. 재밌었다, 재밌었어.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그 일을 닮아 간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전부 같은 모양의 몸과 마음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것. 학교에는 수십 명의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한 번 기억을 떠올려 보라. 그 선생님들의 판서 하는 모습, 말하는 습관, 혼을 낼 때 표정이나 혼을 내는 방식, 교무실에 앉아 있는 자세까지 전부 다르다. 요컨대,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가 어떻게 일하고 있느냐도 중요한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일 것이고, 카프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므로 그건 결국 그의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정혜윤의 <사생활의 천재들>을 읽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이 일상이라면, 그 일상의 대부분을 '일'을 하며 보내는 우리에게 사생활이란 결국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의 이야기가 될 확률이 크다.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 뜻이야 잘 알고 있지만) 당신의 사생활과 일은 얼마나 멀리 있느냐고 되물어야 한다. 일은 '내'가 아닌가? 내가 사랑하는 어떤 일은 먹고 자는 것보다도 나와 가깝다. 때로는 일이 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때의 일과 나의 관계는 '워커홀릭'이나 '워라밸' 어느 쪽과도 멀리 있다. 그래. 어쩌면 그건 사랑하는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일과 사랑에 빠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런 일을 자주 겪는다. 어느 날 선생님이 유난히 날카롭고 예민하다면 나는 짝꿍과 이런 대화를 나눌 것이다. "담임 어제 부부싸움 한 거 아님?" 직장 상사가 보고서의 쉼표 하나로 꼬투리를 잡는다면 메신저로 이런 대화가 오갈 것이다. "어제 부장이 산 주식 떨어졌지?" 그러니 우리에게 서로의 일상이란 멀리 떨어지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사생활을 알아서 뭐하느냐고. 그렇다면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생활은 "스캔들, 취미생활이나 개인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적당히 공개하는 사교적이고 예의 바른 시간들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고독한 시간과 공적인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세계를 뜻하는데, 그 "작은 세계의 한 귀퉁이는 열려있어서 큰 세계로 흘러들어"가고, 그건 마치 "한 알의 소금이 대양에 흘러들어가는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이 소개하는 여덟 명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생활의 천재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생활을 보여주는 데서 천재들이 아니라 사생활을 살아내는 데서 천재들이다. 그들은 진부하고 시시하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데서 천재다. 그들은 자기 삶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문제를 직면하는 데, 그것을 푸는 데, 그것에서 보편성을 보는 데 천재적이다. 즉 그들은 삶의 태도에서 천재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하며 사는지는 자기 삶의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을 풀고, 그것에서 보편성을 보는 과정이자 결과일 것이다. 그들이 일을 하며 겪는 다양한 문제들은 결국 '그들 자신'과 다시 마주하는 문제겠고, 그럴 때 그들은 진부하고 시시하게 살지 않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는 지에 대한 인터뷰집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책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모두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연다큐멘터리 감독, 영화 감독, 만화가, 야생 영장류 학자, 청년운동가, 사회학자, 정치경제학자, 천문인마을 천문대장.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고, 가진 게 없었고, 맨 몸으로 부딪혔고, 실패했었는지에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성공하였다!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면 식상했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찾아가는 중임을 밝힌다. 여전히 과정에 있다고 말한다. 나는 다시 이 책의 프롤로그로 돌아간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한 후배가 책을 출간했을 때를 들려준다. 그때 자신이 왜 그를 응원했으며, 만약 그 후배가 자신에게도 '축사'를 허락했다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이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현실주의자가 되기 바랍니다. 이 사이에 깨문 그 희망 때문에, 끝없는 피로 한가운데서도 일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 희망 때문에, 적절치 못한 순간에 외침을 참을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 희망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악을 쓰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이 사이에 희망을 물고 있는 사람은 형제든 자매든 존경받을 만 합니다."


그들은 모두 미약하게 시작했고 여러 번 실패했다. 그들은 숲 속에 들어서자마자 호랑이를 만난 적도 없고, 첫 영화로 천재로 인정받은 후 승승장구 한 적도 없고, 선을 긋는 대로 만화가 완성 되지도 않았다. 야생이 인간을 쉬이 허락한 적 없고, 청년들의 삶이 편안한 적이 없으니 말해 무엇하겠으며, 사회는 더 말해 무엇하며 정치경제라니. 하늘의 별은 사정이 좀 낫지 않느냐고? 말도 마시라.


"마침내 비트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중략) 한 달만 지나면 고립된 느낌이 듭니다. (중략) 호랑이에게 공격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바로 혼자 있는 것입니다." -자연다큐멘터리 감독, 박수용


"저는 가장 비참하고 초라한 제 모습을 봐버렸습니다. 자기 연민이 골수까지 박힌 인간이 타인한테 할 수 있는 일을 본 겁니다. 저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가장 불쌍한 것이 아니라 서로 불쌍한 것이다. 서로의 불쌍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영화 감독, 변영주


"저는 평생 거울을 앞에 두고 살아왔습니다. 그 거울에 대고 평생 미치도록 궁금했습니다. 난 왜 이런 몸으로 태어났을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태어났을까? 제 거울은 저를 부정적으로 비춰줍니다. 만화는 그런 제가 혼자서만 갖는 유일한 확신이었습니다." -만화가, 윤태호


"그런데 장소만이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아닙니다. 아예 인간 한 명 한 명이 다른 인간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쉴 만한 곳, 살아갈 곳이 되는 거죠." -야생 영장류 학자, 김산하


"제 관심은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청년운동가, 조성주


"제가 수업을 할 때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은 자기들 언어로 재현합니다. '씨발'과 '졸라', '그냥'이 넘쳐납니다. 제가 만약 가르치러만 갔다면 맥 빠지고 실망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 이런 언어로 설명하는구나!' 깨닫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르치러 갔다가 경청하게 된 것입니다." -사회학자, 엄기호


"내 생각에 저는 더러운 인간인데, 저 같은 더러운 인간도 그런 경험을 했을 때 뼈저리게 느낀 건 남이 불행하면 내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치 허무주의와 불안 문제. 그것을 한 방에 날리는 게 연대예요. 함께 사는 세상."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별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그가 맨 먼저 하는 말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기대를 내려놓으라고, 휘황찬란한 은하 사진 같은 것은 잊으라고, 대신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 눈으로 직접 보라고 합니다." -천문인마을 천문대장, 정병호


그들이 그 작고 사소한 것들을 계속 해나갈 때, 그래서 기어이 소금 한 알을 바다에 빠뜨릴 때, 그들의 사생활은 무한히 확장되어 가장 크고 넓은 세상과 연결되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들은 다시 그들의 사생활로 돌아간다. 그들은 알고 있다.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라는 걸. 오늘 내가 하루를 살아내지 않으면 내 인생도 없다는 걸. 그들은 언제 힘들었냐는 듯 말을 건넨다. 그러지 말고, 이 호랑이 좀 보세요, 별똥별을 본 적이 있나요? 긴팔 원숭이와 눈이 마주쳐본 적 있어요? 제가 그린 만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우리가 왜 함께 힘든지 아세요? 어떻게 해야 덜 힘들 수 있을까요? 그 말들을 듣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일상으로, 사생활 속으로 쑥 하고 빠져든다.




삼십 여년 전에 갈색 유리 아래 반달 모양의 구멍으로 들여다 본 간호사 언니들의 세계는 너무나 신비롭고 또한 완벽했다. 숙련된 손놀림, 약종이를 빠르게 접으며 가끔씩 본인들만 알아듣는 소리로 농담을 주고 받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그들에게도 돌아갈 사생활이 있다는 걸 상상할 만큼 머리가 굵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내 사생활과 내 일이,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는 것들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상상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을 써야 했다. 하물며 내가 괴로워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일에서 뭔가를 시작해도 된다는 걸, 무조건 멀리 가기 위해서, 무조건 떠나기 위해서 뭔가를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제법 자라서, 직업인들의 숙련된 몸짓이나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언어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삐뚤어진 어깨나 닳아버린 구두 굽, 낡은 유니폼이나, 잠깐의 한숨에 섞인 그들의 진짜 사생활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비록 아직도 나의 괴로움에서 삶을 꽃피우는 일에는 서툴지만, 적어도 괴로움에서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줄 알게 되었다. 그건 정말로, 이 사이에 문 희망 같은 것, 바다에 흘려보내는 소금 같은 것, 미약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나는 더 크고 좋은 것들 사이에서도 이 미약하고 분명한 것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간호사 언니들이 좀 보고 싶다. 갈색 유리 너머가 아닌 바로 곁에서 맥주 한 잔 같이 하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이 사이로 깨문 희망이 조금 더 커져도 괜찮겠다. 와그작, 우리는 함께 그 희망을 깨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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