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불화하는 말들>
나는 글쓰기를 - 정확히 말하자면 '문학적 글쓰기'를 - 배운 적이 없다. 인문 대학에서 공부했으니 '논리적 글쓰기' 훈련은 어느 정도 되었겠지만(장담할 수는 없다.), 문학적 글쓰기에 대해서라면, 나는 따로 배운 적이 없다. 이렇게 뜬금없이 고백하는 이유는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평소보다도 좀 더 높아질 때 - 예를 들어 괜찮은 작법서나 글쓰기 에세이를 읽었을 때, 혹은 오늘 리뷰할 책처럼 좋아하는 작가가 강의한 내용을 옮긴 책을 읽을 때 - '직강'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하기 때문이다. 아. .이런 얘기는 책상에 앉아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심지어 강의하는 이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듣고 싶어! 오해는 마시라. 내가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어서 이 모양 이 꼴인 거라고 신세 한탄할 마음도 없고, 안 배웠는데도 이 정도 쓰는 거면 됐지, 뭐 라며 쉽게 만족할 생각도 없다. (섣부른 자족과 신세 한탄은 언제나 혼자 알아서 잘하고 있다)
그럼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이 나는 좀 부러웠나 보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했나 보다. 이성복 시인에게 시 창작 강의를 듣는 기분은 대체 어떤 걸까. 나는 아마도 쉽게 알 수는 없을 기분. 이 강의는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있었다고 하니까, 봄에도 가을에도 강의했겠구나. 어차피 대학 수업은 일 년 중 날이 가장 좋을 때만 있으니까. 하지만 이 강의를 들은 학생들도 매주 시 창작 과제 때문에 괴로웠겠지? 그래서 정작 이 수업이 얼마나 좋은지는 잘 몰랐을 거야. (사악하다 사악해.) 내가 대학 때 들은 주옥같은 강의들도 나중에야 그 가치를 깨닫곤 했으니까. 막심 고리끼에 대해 발표했던 러시아 문화사 강의, 정치가 무엇인지 정말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던 정치란 무엇인가 강의 같은 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아름다웠나. 그때 한 수업에서 나보다 세 학 번 위의 선배가 이런 질문을 했었지. "교수님, 모두가 이기는 방법은 정말 없습니까?" 그러자 수업도 학점도 대단히 너그럽고 아름다워서 가장 큰 대형 강의실 좌석이 모자랐던 노 교수님이 이렇게 답하셨었지. "아니, 모두가 이기는 방법은 분명히 있네. 자네가 찾을 수 있을걸세. 나는 말을 유언처럼 하네." 나는 그때 조금 울었는데. 그렇게 감동해놓고도 시험이 싫어서 - 정확하게는 시험 공부가 싫어서 - 열람실에 자리만 맡아 놓고 밤새 수다 떨러 다녔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늙어서 무슨 도전이냐, 같은 시시한 말을 뒷받침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어떤 일이 나에게 맞춤해지는 시기는 따로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늘 곁에 있었지만, 내가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하게 된 것도, 그래서 새삼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있었던 어떤 강의의 강의록을 읽으며 심장이 덜컹하도록 부러워하게 된 것도 다 지금이 나에게 글의 때가 찾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실제로 2006년에(나는 당시에 대학생이었으니까), 우연히 누군가 저 강의를 들으러 와보라고 초대를 했다고 해도, 아마 그때의 나는 "그래? 그거참 좋은 제안이다"라고 웃으며 말하고 금세 잊었을 테니까. 그때의 나에게는 다른 것들이 있었다. 더 간절하고 때론 더 간질거리는 것들이. 그러니 이 모든 넋두리가 그저 넋두리임을 알지만, 여전히 나는 이 귀하고, 얇은, 얇아서 더 귀한 이 책이 참 소중하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무슨 독후감을 쓸 수 있겠나. 이 책은 무려 시를 창작하고 싶어서 모인 학생들에게 '시'에 대해, '시를 쓰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인데. 아니, 차라리 시 자체를, 시 쓰는 일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심지어 그 말들이 마치 한 편의 시처럼 꿰어져 꼭 시처럼 적혀 있는데. 나는 사실 이 책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이 아주 많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이 책의 첫 단어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모두 좋다. 버릴 것이 없고, 어디를 펼쳐서 다시 읽어도 모두 내 마음 같다. 그런데도 나는 쓸 말이 없다. 그런데 뭐든 쓰고 싶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혹은 할 말이 너무 없어서, 나는 쓰고 싶다. 내가 쓰고 싶은 그것이 어쩌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려나. 나는 말할 수 없이 말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쓰기 위해 지금 쓰고 있다. 그래, 이건 15년이나 늦은 수강, 그것도 남의 학교 수업에 몰래 들어가서 강의를 듣는 도강이다.
(책에는 강의 중에 이성복 시인이 시의 첫 구절을 주고 이어쓰기를 해오라는 부분이 있다. 굵게 표시된 구절이 제시된 것이고 나는 시 대신 그 구절들을 포함하는 짧은 이야기를 한 편 써보았다.)
"왜 그렇게 안 살아? 내가 원하는데. . ."
내 말에 당신은 당황한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해왔는데, 당신은 지금 꼭 그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의 얼굴이다. 나는 그게 화가 나기보다는 의아하다. 그 얼굴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아서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정말로 마치 그 말이 처음 듣는 것처럼 충격적이라면, 이전까지의 내 말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 그보다는 이전까지의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을까. 당신과 함께 있지 못했었나. 그 마음이 지난 시간을 헤매고 있었나.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어떤 날에 가 있었나.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않았다면' 하는 간절함에 묶여 있었나. 나 역시, 마치 처음 발음하는 것처럼 말해본다.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요." 어쩌면 이 말은 오늘 처음 내게서 나왔다. 당신의 마음에 닿기까지 그 긴 세월이 필요했음을, 당신의 마음을 오래 두드려야 했음을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으니까. 나는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솟는다.
그런데 당신은 어제 일을 모두 잊은 듯한 얼굴이다. 편안하길 바란다는 내 말을 모두 다 알아들은 듯하던 그 얼굴은 사라졌다. 과거를 헤매는 얼굴, 충혈된 눈, 황급한 발걸음,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 같이 위태로운 목소리. 나는 답답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모른다고,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런 얼굴을 하지 말라고 화내고 싶다. 나는 왜 당신에게 그럴 수 없는 걸까. 당신과 내가 무슨 사이이길래 나는 당신을 밀어낼 수 없나. 밀어내고 싶지 않나. 나는 당신에게 화를 내는 대신 "아침이 됐다고 지난 밤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건 마치 "괜찮아, 무서워하지마."라는 위로의 말처럼 들려서 나는 놀란다.
왜 그땐 몰랐을까? 봄에 내리는 눈은 그저 철이 지나버린 지각생이 아니라는 걸. 그건 마치 꾹꾹 눌러뒀던 감정이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흘러나오게 돼 있는 것처럼 정해진 일이라는 걸. 그리고 그건 그렇게 무서운 일도 아니라는 걸. 흘러나오는 감정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봄에 내리는 눈처럼. 익숙하지 않은 길을 무턱대고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봄에 내리는 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는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그 순간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지난 겨울을 떠올리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 된다. 너, 지금 내리게 되었구나, 말해주면 된다. 그 간단한 일을 왜 그땐 몰랐을까?
힘들다던 당신에게 그는 늘 말했다. "오늘 밤은 안 돼." "넌 왜 꼭 지금 그러는 거야?" 그러면 당신은 문득 당신이 이 세상일을 다 잘못한 것처럼 느꼈다. 그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어떤 일에도 쉽게 확신을 가지지 못하던 당신이지만, 그 순간만은, 작은 아이 앞에 놓인 커다란 돌덩이처럼 확고했다. 다시는 움직일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돌아갈 퇴로를 모두 끊었다. '맞다. 나는 실패한 인간이었지.' 당신 안에서 그 말이 들리기 시작하면, 작은 서랍 속에 몰래 넣어둔 일기장을 누가 확 펼쳐서 읽은 것처럼 당신의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힘들다고 말하지 말걸. . .' 당신이 내놓은 대안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그런 당신에게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해준 게 나였다. "이런 건 별로 안 좋거든? 특히 너에게 말이야. 그 새끼가 뭐라고 하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해." 당신은 놀랐었지.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거구나.' 당신은 속삭였지. 거의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나는 그 새끼를 욕하고 당신은 그런 나를 바라보고 그럼 나는 더 신이 나서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말하던 밤. 당신은 섣불리 생각했을지 몰라. "다시 울 일이 없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오래된 상처는 잘 낫지 않았지. 나은 후에도 가끔 그 자리가 욱신거렸고, 그럴 때마다 당신은 유혹에 시달렸어.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버리고 싶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밤이면 당신의 마음에는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게 당신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는 것. 더 많은 벽을 쌓는 것. 차라리 내가 잘못했다고, 그 벽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죄가 나의 것이라고 나를 때리는 것. 그러면 조금 숨이 쉬어졌다. 내 잘못인 게 나았다. 이 모든 게 너 때문이라면, 아니, 내 불행에 네 잘못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무너져버릴 거야.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너를 나는 용서할 수 없을 테고, 나는 그만큼 불행해질 거야.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런 걸로 하자.
내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잘못은 내가 한 게 아닐까. 당신에게 당신이 지은 벽 밖의 세상을 알게 한 것,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것, 그래서 다시는 울 일이 없을 거라고 기대하게 만든 것, 결국 당신이 내일을 꿈꾸고 동시에 두려워하게 만든 것. 그 모든 게 내 잘못이다. 나는 당신을 그냥 벽 안에 두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 벽을 허물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을 거기에 두어야 했다.
정말? 정말 그럴까? 당신이 지금 울고 있다고 해서, 당신이 지금 두렵다고 해서, 내가 그 벽 밖으로 당신을 이끈 것이 모두 잘못된 일일까. 나는 자꾸 서성인다. 내 입만 바라보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대답도 섣불리 하지 못한 채 서성인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내리고, 나는 오월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정답은 없다고. 언젠가 당신의 감정들은 결국 그 벽을 모두 녹여 없앨 거라고. 그게 꼭 지금이 아닐 이유는 없다고. 이 눈처럼. 당신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내 입이 조금씩 벌어진다. "두려워해도 괜찮아." 나는 말한다.
(이야기는 처음 지어본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거니까. 쑥스럽지만 이성복 시인의 시 창작 수업을 도강한 기념이라 생각하며 기록해둔다. 시인에게 피드백은 받지 못하겠지만(욕심쟁이. 심지어 이건 시도 아니다.), 나는 과제까지 마쳤으니 그걸로 족하다. 좋은 시간이었다. 고맙습니다.)
십수 년 전에 러시아 문화사 수업에서 막심 고리끼를 발표하던 한 학생은 지금은 자꾸만 쓰고 싶어서, 쓰는 내가 가장 괜찮은 사람이 되어 매일 모니터 앞을 서성인다. 이성복 시인의 시 창작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들은 모두 시인이 되었을까. 나는 그렇지는 않으리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삶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계획한 대로의 내일을 마련해두지는 않는다. 삶은 장난꾸러기이고 심술쟁이여서 가끔은 아주 간절한 일조차도(아니, 간절하기 때문에 더욱) 이뤄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 중 아주 짧은 짬을 내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게 간절한 것을 해볼 수는 있다. 내가 어디로 갈지, 어디에 닿을지는 알 수 없어도, 그래서 더 이상 5년 후, 10년 후의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게 되었대도,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의 짧은 휴식 시간 동안, 잠들기 전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고요한 시간에 시를 생각하고 글쓰기를 떠올리고 어제 읽다 만 책의 뒷부분을 펼칠 수 있다.
내가 알게 된 글쓰기의 가장 좋은 점이라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어제 열 장의 에세이를 적었다. 하지만 오늘 (불행하게도) 그 에세이의 모든 부분이 속속들이 별로라는 것을 깨닫는다. 절망적이지만, 또 아주 희망적인 건, '다시 쓰면 된다'는 것. "더없이 해방적인 이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필요하면 하루에 천 번이라도. (중략) 글쓰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저항하고, 미루고, 경로에서 이탈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할 도구와 능력이 있다. 모든 문장은 새롭다. 모든 단락과 장, 책은 우리가 한 번도 닿지 않았던 나라다."*
그래서 글쓰기는 내게 언제나 '희망'의 상징이다. 물론 아주 많은 고난과 좌절, 실패를 예약한 희망이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삶이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가더라도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그저 다시 시작하면 되고, 글쓰기 역시 그렇다. 그걸로 충분하다. 글쓰기는 곧 삶에 대한 은유이며, 삶 그 자체다. 우리는 계획 없이 삶을 시작했고 계획 없이 삶을 마칠 것이므로. 모든 우연의 연속인 삶에서 어쩌면 '쓴다'는 행위만은 나에게 유일하게 확실한 현재이며 실재다.
그러니 다시, 다시. 살아간다. 쓴다.
*대니 샤피로, 한유주옮김,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