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콜드웰,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가족 호러 우주 로맨스 코믹 스릴러, 그러니까 뭐든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오늘날에도 유일하게 그 이야기 안에서 잘 다루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다시'의 과정일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뭔가를 잃거나 다치거나 아프거나 쫓겨나거나 심지어 죽은 줄 알았다가 자막에 '3년 후'라고 뜨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좀 더 멋있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연하다. 그 '3년 동안'의 이야기는 사실 재미가 별로 없다. 대부분은 비슷한 동작의 무한 반복일 것이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 비슷한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 다시 말해 주인공이 우리가 바라는 '그 모습'이 되기까지 우리가 기대할 것은 '좌절'과 '다시 시작'과 그 둘의 끝없는 반복일 뿐이다.
하지만 책이라면 어떨까. 나의 헛된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책은 여전히 그 '3년 동안'을 다루는 매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찾아 읽는 사람들 역시, 그 시간을 '빨리 감기'로 넘겨버리지 않고,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에 잘 다루지 않는 그 시간을 궁금해하고 찾아보는 사람들일거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쨌든 그는 극복했다."가 아니라 "그는 오랜 시간 노력해야 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역시 비슷하다. 우리의 삶은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다뤄지지 않은 '3년 동안'이 줄곧 이어지는 것과 비슷하니까.
그녀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장면부터 시작할 것이다. 영혼의 단짝인 캐럴라인 냅, 평생을 바쳐 그녀를 지지해주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을 함께 견뎌준 삶의 동반자였던 반려견 클레멘타인까지. 고작 6년 사이에 그녀는 저들 모두를 잃었다. 그리고 문득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자신의 오른쪽 다리가 통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과연 언제부터 다리가 심각하게 아팠었는지 되짚어보는 그녀. 그녀는 비로소 캐럴라인을 보내야 했을 때도, 아버지가 떠나실 때도, 어머니와 이별할 때도, 클레멘타인이 눈을 껌뻑이다 영영 감아버렸을 때도 다리는 점점 더 아파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고백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차례로 잃은 후 스스로의 삶을 바꿔줄만한 거대한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고. 그러니 클레멘타인이 떠난지 3개월만에 다시 튤라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그녀는 사랑받는 것을 원하기도 했지만, 사랑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함께 창조해낸 제3의 독립체"를 갖기를, 나아가 그것이 "내력 혹은 경험이 되어 점차 강해"지기를. 설령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감각을 엉망으로 만들"지라도.
그녀는 튤라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일거라 믿었겠지만, 아니었다. 그녀의 다리, 생후 6개월에 소아마비를 앓은 이후로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그 오른쪽 다리가 그녀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삶은 나름대로 작용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고유한 움직임과 의지에 따라 흘러간다는 사실"을 그녀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로 경험하게 될 터였다. 물론, 자신의 오른쪽 다리와도 육십 년 만에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고.
게일 콜드웰의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은 정확히 저 '3년 동안'에 대해 쓴 책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긴 순간, 심지어 그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무모한 선택을 했다고 믿었던 순간에 찾아온 예고도, '설명서'도 없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평생 동안 소아마비의 후유증을 앓았다. 그녀의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에 비해 늘 짧았고, 자연히 평생을 절뚝거리며 걸었다. 몸은 기울어졌고,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좋아하는 운동은 수영이 '되'었고, 캐럴라인과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조정은 달리지 않고도 그만큼 강렬한 자극을 온 몸에 전해주기에 선택한 것이었다. 그녀는 '소아마비를 앓는 자신'을 거부하고 멀리 떼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픈 자신은 그대로 그녀의 정체성이었고, 그 아픈 자신을 '데리고' 어디든 상상보다 먼 곳에, 상상보다 힘든 일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 그녀가 스스로 정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하필, '500킬로그램도 거뜬히 끌 수 있는 썰매견인 사모예드'와 다시 한 번 함께 살아보기로 마음 먹은 그 순간에 이제껏 문제가 있어도 문제 없이 잘 살아왔던 오른쪽 다리가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튤라에게도, 게일에게도 이건 참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제대로 된 진단을 듣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 그녀가 듣게 된 이야기는 하지만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녀의 다리 통증이 소아마비로 인한 것이 아니고, 불치의 병도 아니며, 단지 '고관절 치환술'을 통해(물론 큰 수술이지만) 나아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짧았던 다리가 길어질 수도 있고, 재활을 통해 전처럼 절뚝거리지 않고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이런 상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어찌어찌 수술을 받고 실제로는 고통스럽고 지난하지만 책에서는 대략 5-6페이지 정도로 간략하게 설명할 재활의 시기를 지나 드디어 짠! 어느새 성견이 된 튤라와 집 근처 공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유난히 긴 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심지어 그녀가 조정 아마추어 선수가 되어 국제 무대에까지 진출하게 된 성공 스토리!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이제 막 자신의 삶에 찾아온 튤라와 육십 년만에 걸을 줄 알게 된 다리와 어떻게 정을 붙이며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쓴다. 그렇다. 누구도 다루고 싶어하지 않는 그 고통스럽고도 지난한 세월에 대해서 쓴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에게서 멀리 도망치던 튤라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걸어본 적 없던 오른쪽 다리에서 신경과 근육이 처음 만들어지던 과정에 대해, 절뚝거리지 않고 걷는 법을 모르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떠난, 하지만 영원히 떠나지 않을 캐럴라인과 부모님과 클레멘타인에 대해 쓴다.
"근육 대부분이 새로 길어진 다리에 맞추느라 늘어나거나 찢어졌지만, 그 과정에 아예 관여하지 못한 근육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처음 몇 달간 정강이통과 요통, 종아리 경련과 장경인대증후군으로 고통스러웠다. 걷는 법을 다시 익히는 동안 발이 땅을 잘못 짚으면 나중에는 무릎이 아파왔다."
수술과 재활의 과정은 즐겁지 않다. 그녀가 말하듯, '차라리 불편했지만 익숙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남편의 사고와 수술, 그 후의 재활 과정을 오래 지켜보고 있는 지금, 나 역시 그녀의 그런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재활 훈련이 힘든 건, 어떤 '약속'도 보장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질 것이라는 예상, 그것도 내가 죽을 힘을 다해 다리를 천 번씩 들어올려야만 좋아질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은 기운을 북돋우기 보다는 한숨을 쉬게 한다. 진저리 치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그 긴 시간을 건너온 그녀는 말한다. "진정한 변화란 절망도 조금씩 취할 만큼 강해져서 작은 실패를 용인하는 것"이라고. 절망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재활을 견딜 수 없다. 재활은 차라리 매일의 절망을 통해 아주 조금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일테니까. 내가 오늘치의 절망을 견뎌서 내일의 나를 밀어올리는 원리. 게다가 그 변화라는 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하게 일어난다."
남편이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하는지 나는 감히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매일 절망한다. 어제도 그제도 그는 절망했다. 좌절했다. 어느 날은 10년을 넘게 살아온 집의 구조를 전혀 감각하지 못한다. 화장실에 가려다 현관 앞에 서 있기 일쑤다. 티브이를 볼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다. 그저 소리로 듣는다. 그것도 높낮이도 없는, 어색하게 띄어 읽는 기계음으로 듣는다. 어떤 날은(이라고 하기에는 자주), 잠을 자려고 누우면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별에 떨어진 것처럼 온 세상이 밝다. 밝고 희게 빛난다. 남편은 보이지 않으니 물론 눈을 감아도 소용 없다. 마치 남편을 향해 거대한 핀조명을 켜둔 것처럼 절대적인 빛, 그 빛은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속절없이 그 빛 아래 못 박힌 듯 서 있어야 하는 시간. 남편은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운다. 빛과 그늘은 언제나 한쌍이다.
재활의 시간을 건너는 사람에게 타인이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게 얼마나 작은지, 아마 미래의 언젠가 내가 남편과 나의 시간을 책으로 옮기게 된다면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고통을 (거의 전부) 대신해줄 수 없다. 나는 튤라가 낯선 사람을 경계하며 게일을 보호하고, 걷는 속도를 늦춰 게일에게 맞추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게일의 곁에 그저 머무르는 것을 보며 튤라가 꼭 '나 같다'고 느꼈다. 동시에 게일에게 튤라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에게도 내가 '큰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적을 너무 믿지 않는다. 기적은 현란하지만 실증적 근거는 희박해 불빛을 오래 지속하지 않으니까. 대신 나는 느린 경로를 택할 것이다. 하루에 사과를 한 개씩 먹으며 다리 들어 올리기를 천 번 해낼 것이다." 라고 말하는 당신들 곁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게일에게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재활 코치가 그랬던 것처럼, 튤라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을 가장 괴롭히는 건, 아마도 남편이 아무리 오래 견뎌도 다시 볼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남편이 누구보다도 더 불행하다, 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남편의 삶을 정리할 수는, 또한 다른 누군가의 삶을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대신 나는 다른 누군가가 느꼈을 고통과 남편이 느낄 고통은 또 얼마나 다른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에서 비롯한 이야기다. 나는 고통에 대해 알아가려고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고통이 모두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 면이 있었다. 부끄럽다. 지금은 고통이 모두 다르다는 걸, 완전히 다르다는 걸 배우고 있다.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후에는 고통을 뭉뚱그리려는 마음에 바짝 날이 선다. 편리하게 관리하기 위해 고통의 크기를 손쉽게 비교하려는 시도 앞에서 불편한 마음이 든다. 각각의 고통에서 추론해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가 만약 있다면, 그것을 견디는 '일반적인 노하우' 같은 건 없다는 것,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견딘다는 것 뿐이다. 게일이 그랬듯, 나의 남편도 부디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내 오랜 바람이고 기도가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게일 역시 이 책을 쓰기 전에 어떤 똑똑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 않았을까. '왜 꼭 3년 동안의 이야기를 써야해? 그냥 3년 후의 멋진 네 모습을 쓰면 어때?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더 좋아할 거야. 그렇게 쓰는 게 더 잘 팔릴거야.' 내 상상이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게일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가.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다시 사랑하기를 선택하고, 육십 년만에 걸음마를 연습하고, 이제는 누구도 읽지 않을(거라고 예상가능한) 고통의 시간을 책으로 쓰기로 한 사람. 하지만 나는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이야기는 '3년 후'가 아니라 '3년 동안'의 기록일 거라고 믿는다. 화려한 영광의 순간보다, 그 뒤에 가려진 고통의 순간들일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게일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어떤 '성공 스토리'보다도 그녀의 이야기가 가장 필요했고, 가장 아름다웠다.
그리고 게일에게도, 나의 남편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당신들은 나의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