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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Feb 21. 2018

두 번째 결혼기념일

"이 돈이면 여행을 가겠다! 우리 그냥 맘 편히 보낼까?"


멍석을 깔아주면 쭈뼛거리며 '뭘 이런 걸 다...' 라며 부담스러워하는 우리 부부. 그런 우리가 기념일을 보내는 방법에는 나름의 역사가 있다.


6년의 연애 기간 동안 크고 작은 기념일을 챙기면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사건들이 많았다. 막상 '무슨 무슨 날' 이라는 칭호를 붙이면 우리 둘의 마음에는 더욱 즐거워야 한다, 뭔가 특별해야 한다는 모종의 부담감이 작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기를 먹으러 가서 고기가 타는지 마는지, 영화를 보러 가서 영화가 시작하는지 끝나는지도 모른채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더 특별하게! 오늘을 보내야하나 각자의 고민을 하다가 결국엔 술을 마시거나 사소한 일로 싸우기 일쑤였던 거다.


부부가 되고 나서도 그런 상황은 반복되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상황을 서로 눈치채게 된다. 이번 부부 생일을 앞두고도 우린 참, 많은, 계획을 세워봤더랬다. 계획 속에서 우리는 경주도 가고, 호텔에서 1박도 했다가, 집 앞 단골 술집에서 진하게 한잔도 하고, 서울에서 가기 좋은 데이트 코스는 빠짐 없이 들러보고, 집에서 재밌는 영화 다운 받아서 뒹굴거리기까지 안해본 것 없이 해봤던 것이다. 그 수많은 시뮬레이션이 지나고 우리는 드디어, 지금까지 말했던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하고 싶은 게 생길 때까지 마음을 비우기로 했던 것이다.(!)




며칠 간의 공백 이후 우리는 맛있는 걸 먹고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일정에 동의했다. 화려하고 굉장한 시뮬레이션에 비하면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일정이지만 우리 둘은 알고 있다. 아무 멍석도 깔지 않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가 결국 가장 소중한 하루가 된다는 것을.


배부르게 맛있는 밥을 먹고, 발길 닿는대로 구경도 하며 더위도 잊은채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누가 더 많이 먹었나 나온 배를 확인하고 시덥지 않은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며 사람 구경, 물건 구경을 하는 건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필요한 일, 해야하는 일' 에서 가장 먼 마음으로 여유를 만끽하는 것- 그렇게 내키는대로의 걸음은 언제나 옳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저녁 메뉴를 정하고 오래 걸어 아픈 발을 쉬게하면서, "오늘 하루 좋았어"라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우리의 기념일은 완성되었다. 하나도 버릴 것 없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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